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잠언 24: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난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으니까, 뭐랄까? 특수목회라고 할 수 있지. 일종의 순회선교 같은 건데… 친구의 말이 멋진데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다. 통화로나마 안부를 물은 게 얼추 십여 년 이상은 지난 것 같았다. 오는 3월에 저들이 만나자는 것인데 ‘나 때문에’ 인천에서들 모인다고 하니, 난감하게 됐다. 선생을 주축으로 어떻게 말이 그리 돌았는가보다. 그 가운데 모 신대원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친구가 자신이 할 일(?)을 그리 설명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어느 시점에서 그리워들 하다 모이게 된 거였다. 그러니 나더러 장소를 물색하라는데, 고기에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정도의 장소면 된다고들 하였다. 마침 다른 친구가 인천 저쪽에 산다고 하여 부러 전화를 하였다. 그리고 거기 어디 마땅한 장소를 정하면, 후에 나 또한 그리 가던가…. 유난히 각별했던 선생과의 시절을 생각하면 고마운 일인데, 그렇다고 내가 낄 자리는 아닌 것 같아 마음이 그랬다. 그러다 뒤늦게 부르심을 느끼고(?) 신대원을 하려는 친구의 근황에 반가움이 들었던 것이다.
글쎄, 나의 선입견일까? 어떤 불편함으로 마음이 좋게 여기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평신도 사역으로는 한계가 있어 뒤늦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됐다는 것인데, 거야 하나님과 저의 문제니까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수단의 하나여서야 쓰겠나! 주의 일을 한다는 게 직책에 따른 필요를 느낀다는 게… 것도 마치 하나님에게 그러니 이렇게 하시라, 통보하듯 마치 자신의 갈 길을 따라오시라, 하는 소리로 들려서 말이다.
원주에 사는 초등학교 선생 친구와 비교가 됐다. 오전에 전화가 와서 지난 해 대안학교를 세우면서 기진한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가장 믿고 의지했던 어떤 이가 소위말해 뒤통수를 친 모양이었다. 사람 의지하지 말라고 그러시는 거지, 뭐. 친구의 말에 나는 기꺼이 화답하며, 뭘 어떻게 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하냐가 중요한 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구걸한다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두 통화에서 한쪽은 마음이 어려웠고 한쪽은 기뻤다. 저쪽은 비전을 제시하며 그 도약의 발판으로 쉰 살을 넘겨 뒤늦게나마 목사가 되겠다는 소식이고 이쪽은 빌빌하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쪽이 은혜가 되고 저쪽이 경계가 되는 건 왜일까? 자칭 헌신과 봉사를 숭배하는 격이 되기 쉽다. 주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희생을 마치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사는 경우가 있다. 저는 당당히 말한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선을 행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몰아냈습니다.
이를 지혜자는 이렇게 충고한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헐…. 우리 인생은 얼마나 변덕이 심하고 얼마나 교묘하고 얼마나 능청맞은지 모른다. 자기 의를 위해 하는 일을 마치 하나님 때문인 것으로 돌린다. 채권자로 채무자를 대하듯 하나님께 추심한다. 면접에서 떨어진 건 내가 보기에 성경에서 점수가 너무 낮게 나와서 그런 것 같아, 준비한 게 이제 겨우 6개월밖에 안 됐거든! 패인을 분석하는 친구의 말에 ‘아하’ 싶었다.
저들에게 ‘목사’라는 말이 한 직업의 정도일 뿐이다. 우리 동기 중에 신부가 된 애도 있어! 하는 것이다. 별난 직종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 같아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서로가 참 갈 길이 멀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을 잘 안다는 말처럼 허망한 것도 없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 9:11-12).”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얼까?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주님만 바라고 간다는 게 때론 무모하고 가치 없어 보인다. 막연하여서 그러느니 내가 가시적인 결과를 내는 게 낫겠다. 집에서 자란 다메섹의 종 엘리에셀이면 어떻고 몸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면 어떨까? 그게 차라리 현실적이다. 늙은 아내는 경수가 끊겼고, 묘연한 기다림은 잔인하기만하다.
이때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전 9:18).”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뭔가 한다고 여기는 한 하나님은 다만 조력자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할 때 달려오시면 된다. 도움이 필요하면 청할 테니, 남다른 신조와 굳은 신념이면 족하다. 그게 훨씬 보람을 느끼게 하니까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겐 종교를 도피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숭배의 하나로, 그 나음을 입는 데 있어 선별을 과정쯤으로 생각한다. 이만하면 됐지, 싶은.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 고집은 더욱 선명해진다. 정작 가리키는 의미보다 곱은 손등을 마뜩치 않아 한다. 본질이 아닌 것에 자꾸 마음을 뺏기느라, 사고 기능은 떨어지고 주의력은 분산된다. 아, 이거구나! 싶은데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뭐라 할 문제는 아니었다. 곱은 손으로 별을 가리키든 지팡이를 치켜세워 별을 가리키든, 저 맑고 환한 별빛이 무엇을 비추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에 따라가 예수께 경배하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이 단순논리를 왜 그처럼 복잡하게 해석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모르는 이는 한사코 그를 외면하느라 말이 많았고, 사시처럼 초점이 맞지 않은 친구는 구구절절 자기 의를 북돋우느라 말이 많았고, 선생은 제 말에 겨워 꿈과 해몽을 독차지하였고, 나는 어리둥절하여 이게 뭔가? 쩔쩔맸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 다른 말이 굳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새삼 그리울 것도 없고 문득 반가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너무 퍽퍽한가? 풀풀 고비사막에 모래바람이 불 듯 마음은 어수선하였다. 그러다 선생의 말 한 마디, 그때 네가 어려울 때 좀 도와주었으면 될 텐데…. 그러니 오늘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아뿔싸! 어찌 말이 되지 않을 상대였구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좀 더 시간을 두고 봐야 알 일이겠다. 인상적이었던 건 오전에 통화했던 친구와 오후에 통화했던 친구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은 왠지 서로 다른 분이었다. 점심 때 아이와 열띤(?) 성경공부를 하면서, 아! 이 둘의 본 모습이 어떠한가 알 수 있었다. 내 멍에가 아니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내 수단과 목적의 대상이 아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17).” 그 가운데, “내 양을 치라(16).” 그 의미는 너무도 선명하여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내가 복잡할 거 없다. 그날에 거기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또한 나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주님뿐이라.
행여 누구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자리라면, 굳이. 오늘 말씀은 단호하다.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그럼에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내가 아니었다. 나의 수고와 헌신이 목적이 아니었다. 이를 숭배하는, 곧 이를 자랑으로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고백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이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0) | 2017.02.26 |
---|---|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0) | 2017.02.25 |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0) | 2017.02.23 |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0) | 2017.02.22 |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0) | 2017.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