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전봉석 2017. 2. 25. 07:2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잠언 25:2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24:1

 

 

 

막 밉다가도, 이 일이 혹은 저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겠지? 생각하면 더는 뭐라 할 수 없다. 가령 느닷없고 난데없는 처신에 속상하고 화가 난다. 좀 전에 당부하고 일러 보냈는데, 뜬금없이 아이가 그만둔단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이엄마가 그리 결정하면 그리 되는 거다. 아무런 자초지종도 없이 말이다. 낮에는 새로 시작한 아이 셋과 수업을 하는데, 이 녀석들이 아주 가관이라. 자기들 멋대로 구는 것이다. 문득 이런 애들한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어 욕이 올라오기도 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요즘 묵상하고 있는 전도서를 ‘우연히’ 들췄는데,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하시는 게 아닌가! 아, 이런! 마치 거짓말처럼 무모하고 한심하게 여겨져도 아이들을 보고 해서도 안 되고, 돈벌이를 염두에 둬서도 안 되고, 뭔가 다른 대단히 심오한(?) 나의 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하시는 명령인 것이다.

 

툴툴거리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 아침 한 번 더 이르시는 것 같다.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 25:22).” 주님만 보고 간다는 게 참 무모하기까지 하다. 대체 이 무슨 허비인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할 판에 무슨 사치를 떠나? 싶기도 하고, 내 재능과 시간을 이처럼 허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한 것이, 문득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은 일러 보여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3).” 아, 그녀의 허비를 허비로 보지 않으시는 이가 계시구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그렇게 따지고 보면 하나님보다 허비가 심한 경우가 또 있을까?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빛을 주시고 해와 달과 별과 바람으로 무심히 또 하루의 일상을 허락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아예 주를 부인하고 곡해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이에게까지 말이다.

 

말씀을 실현하며 산다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구나. 유독 예민하고 계산적이며 엄밀하게 구는 것은 말씀을 실현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의를 실현하는 것이었구나. 내가 왜 이런 애들한테 공짜로 이 수고를 하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함이었구나.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인데. 나야말로 어찌 구제할 수 없는 자이었는데.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 38).”

 

말씀을 실현하는 삶은 자아를 실현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기만족이 왜 말씀과 배치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떤 보람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남들이 몰라준다 해도 뿌듯하니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는 식의 자기논리도 아니었다. 이건 또 후에 내가 하나님께 청구하는 빌미가 된다. “우매한 자들의 수고는 자신을 피곤하게 할 뿐이라 그들은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전 10:15).”

 

그렇구나, 자기만족에 겨워하는 것도 꼴불견이었다. 마치 바리새인처럼 그런 구별된 자신을 감사하며 황홀해하는 꼴이겠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중요한 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누구 때문도 아니고, 뭘 이루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경건을 도모하는 노력의 하나로도 아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였다.

 

그렇지 않을 때 남에 대해 인색한 것이다. 괜히 엄하게 군다. 어떻게 저럴 수 있어? 하는 아니꼬움이 득시글거리는 것이다. 그런 자가 무슨… 하면서 이어지는 내 안에 가차 없는 평가가 결국에는 다 내가 받을 거였다. 자기 기준으로 남을 평가한다는 게 그 근본이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다는 소리다. 그 뜻을 구분을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아니 신뢰도가 낮아진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그 믿음이란 게 내 것이었다. 신조였고 신념이었다. 그래서 때론 하나님까지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 하나님 맞아?

 

이에 바울은 그처럼 자중할 것을 강조하였구나.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는 이어서,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아, 공손함이란 하나님과의 사이가 온전할 때 드러나는 성품이었구나!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 수 있는 것도 실은 나의 무던한 수고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애통하는 자’의 마음은 공연히 원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으로 간곡히 바라는 거였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어떠하든지 주의 뜻을 바라는 마음이었고, 그것은 결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그러할 수 있었다. 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 ‘마음이 청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된다. 비로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로 산다.

 

이게 그러니까 모두 한 사람의 덕목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시었다. 그리하여 그의 장성하신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었다. 이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그렇구나. 앞서 간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했구나… 그런 거였다.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하는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할 수 없어서, 나는 다만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생각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

 

그래 맞다. 열심은 때로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유난히 바쁘고, 바쁜 일상을 훈장처럼 여기며 자기 공로를 의지한다. 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걸 자랑으로 삼는다. 그래서 완고하다. 남에 대해 엄하다. 가혹할 정도로 이치를 따진다. 원칙을 준수하며 사리분별이 정확한 것을 자랑한다. 남에게도 요구하며 훈계한다. 멸시한다. 분노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따지고 들기 좋아한다. “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재난을 보았노니 곧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이라(전 10:5).”

 

부모가 선생이 상사가 선배가 다 그러하여 모순이다. 이를 지혜자는 재난으로 보았다. 가차 없는 부모의 꾸지람이 아이를 병들게 하였다. 가혹한 평가와 훈계가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그래놓고는 자신들은 태평하다.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한다. 이를 극복하는 법은 “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4).” 곧 가신다. 금세 후회한다. 그런 걸 거기다 대고 같이 뭐라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공손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게. 요즘 배우는 게 많다. 이게 돈 받고 하는 일이라면 그래서 억지로라도 참았을 텐데, 이젠 알 수 없는 여유가 있다. 내 코가 석 잔데도 퍼주게 된다.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르긴 몰라도 나는 더했으니까. 이를 오래 참고 기다리신 이를 이제는 내가 사모하니까. 내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분이 그러셨으니까 나도 그러고 싶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따위의 값도 이젠 대수롭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주의 은총뿐이다. 다른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전 4:5).” 다른 게 뭐 있나? 별 수 없다. 주님뿐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저를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실은 나의 믿음도 모두 거짓될 수 있다. 그날에 믿음을 보시겠는가? 우리가 믿는다는 믿음보다 변덕스러운 게 또 있을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눅 18:9).”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게 나 자신에게였다. 누구에게 혹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결국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게 또 어찌 진리일 수 있을까? 내가 나를 믿는 일보다 위험한 게 또 있을까? 그래서 오늘 말씀도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잠 25:28).” 하신 것이다. 나의 열심이 구속의 조건은 아니었다. 나의 수고가 은총의 자격이 아니었고, 나의 애씀이 은혜의 기틀이 되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로 인해 내가 배우는 게 많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 아내에게 이와 같은 고백을 하였다. 나는 누구보다 계산적이고 이치를 운운하며 원칙을 들이대고 살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게 다 남을 겨누는 총구였지 실제 나에게는 관대하였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자였는지 모른다. 유난히 열심을 강조하며 위선을 떨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분간하지 못했던 것이구나. 이에 일을 숨기시는 게 그래서였다. 드러내어 알게 하시는 게 은총이다. 은총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된다.

 

아,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감히 내가 무얼 운운하며 감 놔라 배 놔라 할 것인가? 주시는 한 날의 삶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니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 이와 같은 깨달음을 내게 더하시기를. 그리하여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21-22).”

 

돌려받을 생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악하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시 24:2).” 그러므로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