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전봉석 2017. 2. 26. 07:38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잠언 26:26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시편 25:10

 

 

 

어려운 문제를 겪으면서 배우는 게 없다면 그것이 위기다. 정작 이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에만 초점을 맞추는 건 지극히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당장 모면한다 해도 더 큰 문제는 어김없이 닥쳐올 테니까 말이다. 탄핵정국을 맞은 뒤 온 나라가 대치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목소리가 격앙돼 있다. 죽창을 들고 날 뛰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이때 어려움만 있다 사라지면 아무 변화도 얻을 수 없다. 양분된 기사를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친구는 모 당의 경선 참여를 독려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봄은 찾아왔다. 점심께 아내와 함께 산책을 했다. 바람이 찬데 그 기운을 잃은 지 오래였다.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일상은 여전하였다. 사람들의 들뜬 발길이 주말 오후에 쓸려 다니고 있었다. 그러게, 나는 혼자 글방에 있다 이만큼만 나와도 신선하였다. 소래포구에 가서 칼국수를 먹자고 했다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극장엔 막바지 방학을 즐기려는 아이들로 바글거렸다. 주일에 쓸 장을 보고 느릿느릿 걸어서 돌아왔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5-6).” 아침에 나와서 읽은 전도서의 내용이 귓가에 머물렀다. 만사의 성취가 주의 일인 것을. 하여 다만 씨 뿌리기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은 누가 어찌 받든 그것은 내 일이 아닐 거였다. 그럼에도 보람이 없다고 기대할 게 없다고 포기할 게 아닌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임을 지혜는 알고 있다. 충성된 종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니라 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엄밀하게 우리는 불가지론자이다. 무신론자도 아니고 유신론자도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다.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데서 두려워할 줄 아는 자이다. 그의 모든 주인 되심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하는 말씀에서 위로를 얻는다.

 

이해와 상식 너머의 세계를 바라고 구한다는 일은 기적이었다. 이를 알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 때 두려움은 경건해진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전에는 관심을 끌던 것들로부터 놓여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저녁에 딸애가 퇴근하고 오는 길에 맞춰 노트북을 사러 갔다. 벼르고 벼르던 걸 마침 신학기 특가로 판매하는 반 가격대의 것을 만난 것이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려고 시작하는 공부에서 아무래도 제 것 하나쯤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긴 할부로 제 월급에서 물것이지만 조금은 안타깝고 미안했다. 어쩌다 밤 시간에 나가게 된 셈인데 마치 모든 게 낯선 사람처럼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과 여기저기서 담배를 피워대는 이들과 현란한 광고 불빛과 무질서한 차량들 사이에서 어지러웠다.

 

살아온 나의 세상을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겪어야 할 어려움과 번민과 여러 난관을 생각하면 아찔하였다. 이제 내가 믿고 붙들 게 말씀뿐이었다. 돈도 사람도 아닌 주의 이름인 것이 감사하였다. 늘 기도할 때면 부디 주의 길로만 갈 수 있기를. 너는 어느 쪽이냐고 다그치는 세상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온전히 주만 바라보며 나아가기를. 그래 맞다. 겁 없이 사는 세상에서 나는 겁먹었다. 내가 어찌 해보려던 모든 순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민낯을 드러내야 한다면 그리할 용의가 있다. 탕자는 기어이 탕진한 후에야 돌이키는 게 세상 이치였으니까 말이다.

 

남들에겐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아버지 집에 돌아온 자의 평온함은 거리낄게 없는 것이다. 곧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 104:15).” 이는 어떤 이유와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의 흡족함이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16).” 비록 가장 저렴한 것이지만 처음으로 자기 노트북을 가져보는 딸애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안됐으면서도 감사하였다.

 

제 것보다 먼저 가족들, 남들 것을 염두에 두고 사는 아이였다. 한참 그 나이 때 여느 아가씨들의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글어진 신앙고백과 주만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큰 자산이었다. 두 시간씩 걸려 왕복 네 시간의 출퇴근길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한 아이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엿본다. 주가 이루시는 일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 가운데 으뜸이다. 개떡 같은 사람이 개떡 같은 신앙으로, 엉터리로 뿌린 씨 같은데 저처럼 온전히 주를 바라게 하셨지 않나 말이다. 되바라진 여식을 두고 속 끓이는 이들이 수두룩한데 나야말로 거저먹는 장본인이다.

 

씨를 뿌릴 때 누가 이를 어찌 선으로 받을지 혹은 그르게 여길지 알 수 없으나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다. 그러므로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오늘 우리 사회와 비교할 때 이보다 모순된 말씀이 또 있을까? 소망을 어디에 둬야 하는가를 바로 알게 하신다.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씨를 뿌린다는 것, 곧 빛과 소금이 된다는 건 뭔가 대단한 업적이 아니다. 뒤에 들어오는 자를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 바람에 쓰러진 광고판을 세워주고 어느 노인의 궁싯거리는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것. 떡을 나눠주는 일이야말로 그저 가장 보편적인 일상일 거였다. 한 녀석은 3년 넘겨 사랑하던 애와 헤어지고 그 슬픔을 이기기 위해 태국으로 봉사를 떠났다. 얼마나 어디에서 그러고 있을지 묻지 않았다. 것도 나름의 치유가 되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사는 데 있어 좀 유난을 떠는 사람들을 보면 결국 자기 상처에 겨운 것이다. 마지못해 하는 충성도 후에 보면 상급이 있다. 하물며 주를 바라며 사는 마음보다 값진 게 또 있을까? 솔직히 아이들이 교회에 안 나오는 건 나오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지 않나? 그 부모가 신앙을 거절하는 건 곁에서 믿음 없이도 잘만 사는 사람들이 즐비하기 때문이 아닌가? 더 나은 것 같아서 서로는 부자 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선을 행하는 일조차 자기 의를 만족시키려는 데 소용되는 것이다.

 

비루하고 옹색한 것 같지만 주를 바라는 마음보다 부요한 건 없다. 보면 다들 있다고 하는 이가 더욱 옹졸하게 산다. 가진 게 많은 자는 잃을 것도 많은 법이어서 뭐라 한들 듣지 못한다. 주님은 이를 안타깝게 여기셨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이제쯤 되니까 알 것도 같다. 돈이 우선인 세상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란다는 게 결코 쉬울 리 없다. 하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나, 나 같은 사람이(!) 주를 바라는 것이나 둘 다 불가능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 의지와 선택으로 주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보다 확실한 처신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8:9).” 무엇이든 자유하나 무엇에도 나의 자유를 권리로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나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게 충성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성경의 원리는 선명하였다.

 

쌍둥이 아이들이 여행을 가고 중학교 아이들도 노느라 싫어해서 모처럼 토요일이 공휴일처럼 한적하였다. 사랑하는 이들을 곁에 두시고 더불어 믿음 안에서 배우고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의 선배들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게 축복이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씀으로 묵상하고, 이를 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넉넉하심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더 싼 것, 어떻게든 부담 없이 길게 할부로 끊는 노트북이었지만 이를 가난으로 여기지 않고 주신 데 따른 삶의 감사로 여길 수 있는 게 축복이었다.

 

명품을 휘두르고 슈퍼카를 선호하며 두둑한 지갑으로 행복을 측정하는 사람들과 달리, 주신 가운데서 만족하고 감사를 돌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일 거였다. 비록 어떠하다 해도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운데 내주하시는 주의 은총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말이다. 전도서를 통해 솔로몬이 들려주려 했던 축복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주를 경외함으로 감사하고 사는 삶이 복되다. 그러므로 주의 길은 그 길을 걷는 이에게 인자와 진리이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4).” 바라고 구하는 게 복되었다. 곧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5).”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6).” 즉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 아멘.

 

가만히 따라 읽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기도이다.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12-14).” 이는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15).” 이에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