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잠언 28:26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오스왈드 챔버스에 대한 전기문, <순종>(데이비드 맥캐스랜드, 토기장이)을 읽었다. 나의 어릴 적 시절과 중첩되면서 순종하지 못했던 지난날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일찍이 소년 시절에 세례를 받으면서 뜨거웠던 회심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같이 이를 준비하고 사모하였던 것들이 꿈결처럼 스쳐갔다. 우리는 그때 주의 부르심에 호응하였다. 누군 선교사가 되었고 누군 사모가 되었다고 들었다. 챔버스의 생애를 읽으며 저에게 두신 주의 관심과 사랑으로 내 것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 여행을 마치고 아이가 무사히 귀국했다는 문자에 안도하였다. 요즘 자주 눈에 띄고 되뇌는 말씀이 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하는 다윗의 기도가 내 것이었다(시 27:4). 스치듯 누굴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저와 함께 하시기를, 주의 뜻이 드러나기를 위하여 기도하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조성하시는 게 복이었다. 이게 어찌 이런가, 싶어 의구심이 들다가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을 생각하면 온당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때론 분에 넘치는 것 같고 혹은 야박하여 서러운 마음이 들다가도 이 또한 ‘내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하는 말씀 앞에서 안위한다. 이를 마다하고 다른 데 눈을 돌리고 살았던 날들이 후회와 아쉬움으로 밀려오는 것이다.
내가 마주대하고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주의 무궁하신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가끔씩 이런저런 사정을 이야기하는 이에게 주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보여줄 수 있다면…. 돌이켜 내 안의 후회와 아쉬움도 못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주가 나를 아신다.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욥 11:11).” 그러므로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를 의지하며 이제 내가 바라는 한 가지 일, 내 평생에 주의 집에 거하며 주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그의 성전을 사모함이라. 모든 걸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에게는 가장 소중한 게 아버지의 집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기어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봐야 안다. 그러므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킨 거였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 69:9).”
미련하여 더디 믿었던 시절을 통회하며 그래서 아이 적에 예수를 알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절실한 마음이 들었다. 게임에 휩쓸려 정신을 못 차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주의 사랑을 증거 할 수 있을까? 수입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건물 사장에게 어떻게 하면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낼 수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내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으로 주의 뜻을 살펴 중보 하는 일, 마음에 담고 저를 생각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비록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 같으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그러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값지었다. 내려놓는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도약이다. 고생을 끝낸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까지도 짊어지고 따르겠다는 소리다. 내 의지 내 판단을 모두 이양한다는 것이다. 그런 결심까지 감당할 수 없어서, 각오와 다짐마저 내가 이룰 수 없음을 표시하는 것. 오늘 지혜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곧 내려놓음이란 지혜롭게 행동하는 극점이다.
곧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삶.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주의 긍휼하심 앞에 목 놓아 외치는 일,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 8:23).” 하나님이 어찌 나와 함께 하시는지를 저들에게 알게 하는 삶이 빛이요 소금이었다.
뭔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그 쓰임에 맞게 자리하는 것. ‘내가 여기 있사오니’ 하고 주 앞에 거하는 일. 저의 전기문을 읽으면서 저가 붙들고 사모하였던 것에 대하여 이제 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같은 걸 붙들고 같이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는 일이 복되었다. 그것이 저의 일기로 편지로 읽혀지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곁에 있음으로서도 이미 충분하였다.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의 장막 곁에서 일상을 다하는 일,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이럴 수 있는 일상과 그 바라는 마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문제는 도드라진다. 하나 그 번잡스러움 가운데서 주의 평온을 체험하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가 나의 실력을 알게 하는 것처럼 온전히 주를 바라고 있는가? 하는 덴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제격이었다. 거품을 제거한다. 뜬구름 잡던 신앙을 바로 앉힌다. 좌고우면하는 마음을 거머쥔다. 고통이 왜 유용한가 하는 데 이의가 없다. 비로소 주의 사랑을 고백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본 일상이 참 축복이었음을 말이다.
뭔가 대단해야 한다는 생각부터가 그릇되었다. 자기주도적인 학습에서부터 경쟁에 도태되지 않는 삶을 최고로 치는 세상에서 묵묵히 주를 바라고 구하는 일,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다윗은 간곡히 권면하는 것이다. 기다림은 어떤 용맹함보다 담대하고, 확실한 결단보다 강한 것이다. 이는 전적인 신뢰가 바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 이것이 기다림의 발판이었다.
한 사람의 온전한 신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저를 둘러싼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이 얼마나 풍성한지 올해 들어 내내 빠져 있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생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곧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믿음의 위대함이란 그런 거였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흘러넘치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이는 결코 소모가 아니다. 허비가 아닌 것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었다. 이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을 주시기 위하여 주가 오셨다. 하물며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를 들리게 하시고 보이게 하시는 게 이미 주의 은총이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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