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잠언 2:20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시편 30:11-12
누굴 대할 때 나의 기준과 잣대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 주 앞에 확신을 가진 자인만큼 더욱 더 포용력이 필요하겠다. 그런즉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편견은 앞선 판단을 내린다. 은연중에 ‘나와 다르다.’는 선입견을 갖게 한다. 어느 토론프로를 보다가 첨예하게 맞서는 저들 주장이 끝도 없다는 걸 알았다. 종교와 정치는 설득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았다.
늘 그 시간에 글방으로 갔다. 커피를 내리고 챔버스에 대한 전기문을 읽었다. 오는 토요일부터 아이를 보내겠다고 사장이 말했다. 늘 보면 입이 댓 발은 나온 녀석이라 어찌 감당이 되려는가, 잠시 생각을 하였다. 기억해야 하고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하는 이름과 기도제목을 다시 정돈하여 붙였다. 기도할게요, 하고 건넨 말이 빈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야말로 기도에 빚진 자로서 나의 오늘이 누군가의 기도로 인한 응답인 것을 여실히 느끼고 난 다음부터다. 내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점심께 아내가 나와 같이 산책을 갔다. 곧 비가 오려고 하늘이 낮게 내려앉았다. 여느 날보다 몸이 무거운 게 다 그래서였다. 짜장면을 먹고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아들이 필리핀에서 엑스트라로 나오는 것이라 하였다. 기껏 표를 구해 자리에 앉았더니 뭔가 착오가 생겼는지, 영사실에서 오류가 난 모양이었다. 우왕좌왕 시비가 붙고 뒤미처 환불처리에 새로 공짜표까지 주며 사람들을 달랬다. 우리는 보려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그냥 돌아왔다. 늘 정해진 시간을 맴도는 사람처럼 나는 다시 글방으로 올라갔다. 한가한 공휴일 오후였다.
늘 툴툴거리는 아이처럼 나는 아내 앞에서 애가 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왜냐하면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 무얼 자꾸 챙겨주고 일일이 건사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아내라, 그처럼 나 또한 애기 다루듯 하는 게 싫지 않은 것이다. 내가 오늘 이처럼 평안히 눕고 일어나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저의 수고와 헌신인 것을 안다. 아내는 남은 오후에 머리 염색을 하고 수련회에서 돌아오는 딸애를 만났다.
마침 아버지 생신이라 가족들 카톡방에 인사가 올라오고 아버지의 긴 감사의 글이 올려졌다. 지난 주일 각각 흩어졌던 형제가 모인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복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는 건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공동체를 허락하신 것이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전도자의 증언처럼 몇 겹 줄의 기도가 서로를 묶고 이끄는 게 되었다. 한 생을 다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게 있을까?
물론 가장 근본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한데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과 어찌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가장 가깝게는 부모와 형제에게서요, 허락하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다. 그리 마음이 쓰이고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누굴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 같으나 결국 그것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측량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건, ‘내 양을 먹이라.’ 주의 명령을 준행하는 게 된다.
여기서 생각이 다르고 주관이 같지 않다고 해서 배척하고 날선 공방으로 적대시하는 건 옳지 않다. 결국 바울의 증언도,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3).” 이 모든 게 복음을 이루는 데 있었다. 이는 곧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4:20).” 이를 나의 단순한 머리로 이해한다면 현란한 구호가 아니라 삶으로의 실천이었다. 나는 늘 모자란 사람이라 이게 또 말처럼 쉽지 않지만 감사의 단초가 된다.
이를 알게 하시는 게 지혜라. 그 지혜가 나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한다.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거하는 동안 평탄하게 하신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다. 내가 이룬 수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 여겨주시는 주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에 내 마음을 거기에 두는 일. 간직하고 귀를 기울여 내 마음을 명철에 두는 게 복되었다. 은을 구하듯 지혜를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그럴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된다.
그렇구나. 오늘 잠언을 묵상하면서 구구절절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겠다. 더 사모하게 되고 더욱 간절함으로 바라게 되는 마음이 귀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현란한 묘사와 설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상상이 아니라 실제다. 오직 능력에 있다. 이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이게 능력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나는 그럴 수 없는데 그럴 수 있게 하신다. 감당할 수 없는데 감당하고 있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사람인데 그게 또 건사가 되었다. 여기까지 온 게 주의 은혜라. 돌아보면 안다. 내일이 암담하다가도 오늘에 나로 있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면 담대해진다. 내가 무슨 재주로 여기까지 살았나? 내 아버지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운행하셨는가를 보면 안다. 내 형제의 삶을 통해서도 배운다. 능력 주시는 자가 있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5-27).” 나는 그렇지 못한데… 하고 생각하다가, 주의 자비로우심으로 내가 자비로운 자로 살게 된다. 주의 완전하심으로 내가 완전하게 살고 있었다. 주의 깨끗하심으로 내가 깨끗하여진다. 교만하던 나의 눈을 낮추시었다.
가끔은 오늘의 내가 신비로울 따름이다. 뭐 하나 변변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주가 쓰시니 감읍할 따름이다. 내세울 건 둘째 치고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운 것뿐인데, 사장이 자기 아이들을 맡기며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숙이게 하시니 이게 어찌 웃을 일인가? 같이 고개를 숙이며 그저 나는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뿐이다. 아,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이 이런 게 아닐까?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나는 내 것이 아니었다.
살면서 삶 가운데서 주의 뜻을 기리며 묵묵히 준행하는 삶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이었다. 주어진 것에서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도 그런 말씀이었다. 뭔가 다른, 어딘가 다른, 알 수 없는 저들의 눈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일. 그게 또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이겠구나. 마치 퍼즐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듯이 말씀이 말씀으로 이해되고, 주어진 한 날의 밍밍한 삶인 줄 알았는데 어느 것도 의미가 없는 조각은 없었다.
이는 그럴 수 있도록, 그리 행하며 살게 하시는 성령의 간구하심이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오늘 다윗의 시도 아구가 맞는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전에는 그것이 나를 열등하게 여기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춤이 되게 하신다. 곧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낡고 누추한 생각을 감사의 근원이 되게 하심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이로써 나는 드러내어 주를 찬송하게 된다. 누가 물으면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어진 게 아니라 주께서 그리 은혜를 더하신 것에 대하여 증언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단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영원히 되새기고 나열되어 끝이 없는 자랑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 잠시 한 눈을 팔아도 금세 안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아, 그런 거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직 주의 은혜라.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시 30: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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