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잠언 27:3-5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26: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그리하여 주께 생을 다하는 것. 그러기까지 죽어져야 하는 것이 묵은 감정이었다. 충성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 나이가 든다고 해서 저절로 감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곧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다스려지다 잠시 고개를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않은 것처럼 노는 이 둘보다 무겁다.’
공공연히 분노를 외치는 사회다. 이는 잔인하고 창수 같다. 그 안에 투기가 있기 때문이다. ‘투기 앞에야 누가 서랴.’ 그래서 없던 걸로 하는 마음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새겨본다. 말씀을 외면하면 누구라도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너 때문이다.’ 이는 서로의 관계를 훼방하지만 급기야 자기를 병들게 한다.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열등감으로도 내몰리다 이내 ‘내가 그렇지 뭐’ 하는 환멸의 자리에 눕는다.
더 나쁜 건 선동하는 무리다. 부추겨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그래야 할 것처럼 이끈다. 이때 나타나는 증상이 막무가내다. 어떤 설명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해 너머의 감정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더욱 뚜렷해진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내게 분노하는 나다. 화를 다스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어리석은 건 없다. 인위적으로 그러려고 할 때 완고해진다. 엄격해지는 게 다 그런 이유다.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짝 마른 감정은 눅눅한 것보다 위태롭다.
그래서 성경은 일러 우리에게 이 세상과 친해지지 말라는 것이다. 어찌 이 땅에 살면서 저에게 정들지 않을 수 있을까?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딤전 3:2-4).” 한다. 그럴 수 있는 건 하나의 지향점이 있어서다.
곧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주가 우리로 변하게 하셔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위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악착같이 산다는 게 선하지 못하다. 여기는 주를 사랑하는 마음도 해당된다. 악착같다는 건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의지적인 실현이다.
그래서 숭배와 경배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다. 거짓 경배가 숭배다. 경배는 저절로 그리 되는 경탄의 모습이다. 와! 하고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함성이 찬송인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자꾸 자랑하게 된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하는 게 다 흘러넘쳐서다. 숭배는 길어내는 것으로 다분히 인위적이고 억지스럽다. 고단하고 피곤할 따름이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싶은 의무와 책임이 지배하는 것이다.
가족들과의 모임을 기다리며, 오후에 혼자 글방에서 생각하였다. 건물은 텅 비었고 나는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의 인위적인 수고가 주의 사랑을 훼방하는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이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너무 안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쉼을 누리는 게 죄스럽게 여겨져서야 어디…. 그럴 거 없다. 하나님 앞에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 필요했다. 그냥 좋은데 꼭 좋은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아이 하나하나를 생각하다 그래서 안쓰럽고 속상해하다가도 그 또한 지나야 하는 길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거니…! 내 안에 이는 쓸데없는 염려와 근심으로 나는 기도한다. 그래서 더 주를 바란다. 나의 나 된 것에 어쩔 수 없음이여.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의 긍휼하심으로 나를 붙드소서. 오직 주님만으로 살게 하소서. 주만 의지합니다. 나는 되뇌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대체 무엇으로 내가 조금이라도 의로워질 수 있을까?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다는 걸 고백하면서, 그러므로 다시 엎드린다.
결국 하나님은 임의로 나를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우린 다만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빛은 나의 누추함도 드러낸다. 이를 감추려고 하는 게 숭배라면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빛에 놓이는 게 경배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8-10).” 고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다는 건 있는 그대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느라 기를 쓰고 사는 게 성도의 삶이 아닐 거였다. 사역을 위한 사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직 주를 바란다는 건 맹신자가 되는 게 아니라, 이것까지 놓고 주를 따르는 것이었다. 맹신은 자신의 논리와 이론으로 이성을 잃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처럼 비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럴 거였으면 이 장구한 역사는 소용이 없었다. 주님의 인내는 나의 고백을 기다리시는 데까지 이어진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염치없고 송구할 따름이지만 그것으로 더욱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 하나님은 내가 의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아니다. 선을 행할 때를 기다리시는 것도 아니다. 이미 넉넉한 그 빛에 거하기를, 이를 위해 악착같은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찬미와 경배로 나아오기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8).” 안 해본 게 없는 그로서는 이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3).” 다른 더 좋은 수는 없다. 이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4).”
그러므로 나는 기도한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시 26:12).” 이런저런 어렵고 힘든 일이 끊임없이 몰아치지만, 그럼에도 내 발이 평탄한 데 설 수 있는 것은 주를 의지함이라.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3-4).” 그럴 수 있는 게 은혜였다. 내가 수고하여 애쓴 결과가 아니다. 다 해봤으나 헛되다. 한 가지 일, 주를 경외함으로 그 말씀에서 사는 게 복되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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