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전봉석 2017. 3. 1. 07:4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잠언 1:23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시편 29:4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일모레면 3월 신학기인데, 대학은 어찌 됐을까? 얘는 퇴원을 하고 좀 괜찮아졌나? 취업은 됐을까? 제대를 했나? 느닷없는 궁금증에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먼저 잘 연락을 안 하는 사람이라, 그래도 속이 볶이는 데야 별 수 없었다. 재수를 하기로 했다는 말이 속이 상했다. 한두 달만 미리 연락을 했어도 어찌 글쓰기를 좀 준비했으면 좋았을 걸…. 뒤늦은 후회가 또 화가 밀려들었다. 내친김에 교회 아이들에게 모두 연락을 취해보았다. 대체 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나의 오늘은 누군가의 기도응답이다. 저의 기도로 내게 주어지는 날들이다. 내 어머니의 기도였고 내 누이의 기도였다. 십여 년 전 누군가의 기도였고, 몇 세기 전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어느 교회의 애끓는 합심기도였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의 절규어린 기도였다.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대상 19:13).” 이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시 115:14).”

 

곧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하는 저들의 간절한 원함이 그 기도가 오늘에 이어 나를 건재하게 하고 이 나라와 온 인류가 아직도 평온하게 하는 것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마치 이제 더는 나와 상관없다는 듯 내버려두고 있는 마음이어서 더욱 속상했다. 알아서 하겠거니, 어디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자, 하는 고약한 심보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괘씸하게 여기고 서운하게 생각하여 내친 마음이기도 하였다. 아니 그럼 그 지경이 되기 전에 연락을 좀 하지? 하는 섭섭하고 속상한 마음에 미안하였다. 그런 내게 한 아이의 말이 울렸다. 그렇잖아도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랬구나.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

 

나도 늘 기도에 빚진 자로 살면서 대체 누구 앞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살았던 것일까? 아이가 대학에 떨어지고, 취업이 안 돼 졸업을 유예하고 있었고, 별로 좋은 대학이 아니어서 숨기려고만 했고, 4수 5수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고, 뚱하니 울고 싶은 아이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 이름도 뒤로 미루고 기도도 없이 살았던 게 미안하였다. 마치 이는 꾸지람처럼 여겨졌다. 차라리 답장이 안 오면 모를까, 반가이 답이 오고 되레 내 안부를 묻는 말이 책망으로 들렸다.

 

그래서일까? 오늘 아침 말씀이 새삼스럽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이제 돌이켜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저들에게 비추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송구할 따름이었다. 누구보다 사랑의 빚이 많은 사람이다. 기도에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내 업적을 기리듯 나와 상관없이 굴었던 마음을 회개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사장이 건너와 큰 아들 염려를 하였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한참 예민하게 구는 사춘기였다. 야단을 치고 뭐라 얼레고 달래도 들어먹질 않는다면서 어쩌면 좋겠는지 물었다. ‘와 보라.’ 성경의 기본 원리에 따라 그리 말하였다. 내가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찌 행하실지, 보내 보시라. 교육비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나는 더욱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자신 없지만 내가 아는 하나님은 확실하시다. 세 들어 있는 내게 와서 그런 말을 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실 테니 말이다.

 

나의 모자람과 연약함에 대하여는 오히려 주의 능력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어떨 땐 괜찮다가도 사뭇 진지하고 어려워지면 영락없었다. 내가 먼저 아찔하니 긴장이 밀려오는 것이다. 저가 얘기하는 동안에 나는 슬그머니 안정제를 입에 물고 삼켰다.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행여 내가 우쭐하여, 마치 잘나서 저가 내게 오는 것으로 착각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주님은 나를 고약한 상태에 두신다. 싱거운 소릴 할 땐 괜찮다가도 말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때론 가당치도 않아 내 앞가림조차 못하는 주제인데, 이를 알게 하심으로 더욱 주만 바라게 하시려는 것이다. 곧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12:7).” 뭔지 알겠다.

 

당당히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자의 허망함에 대하여 알게 하신다. 사람들로 인정받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내가 드러나고 나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걸, 나의 신경쇠약은 늘 깨닫게 한다. 그런 와중에도 와 보라, 보내시라, 하나님이 이뤄 가실 주의 사역에 대한 신뢰이다. 이는 내게 책망이 되면서 동시에 값진 보화가 된다.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론 억울하고 답답하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내게 두시는 가시에 대하여 감히 바울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행여 나를 드러내는 데 혈안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 오직 주만 바라며 주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시려고… 특별히 오늘 내게 두시는 주의 사랑이었다. 때론 빙충맞고 서러워도 다행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아는데, 나의 계획은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기 일쑤인 나의 조급함과 우쭐됨을 잘 안다. 나대고 내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기질도 있다. 그러므로 기도로 주께 나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두시는 이 모든 게 기도응답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에 나는 기도응답에 의한 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탕자보다 못하다. 내 스스로 깨달아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하지도 못했다. 누구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건 매번 어렵다. 항상 내가 먼저다. 당최 이기적이다.

 

그런 내가 오늘을 이처럼 주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게, 기도응답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오늘 나의 기도는 하나님과 나란히 걷게 한다. 행여 그릇된 길로 행하게 될 때, 주의 책망은 아이의 문자를 통해서도 주어진다. 우쭐하는 마음과 달리 어떤 불안이 엄습함으로 몰래 약을 먹어야 하는 지질함으로 관여하신다. 나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기도는 무엇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그 무엇 자체였다. 마치 뭔가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중심을 다하는 게 기도인 줄 알았는데 그 자체로 이미 시작되었다. 영생은 날마다 오늘부터인 것처럼 말이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할 때 그 무엇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는 심판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에서 근거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믿지 않는 것이 이미 심판이다. 역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이를 믿을 수 있는 게 은혜이고 구원이고 신비였다. 어떻게 이게 믿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곧 거듭남의 기적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 아침에 소리 내어 읽은 말씀이 오후가 다 돼 이해가 되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기도가 그와 같았다. 나의 관심도 사랑도 말 한 마디도 그런 거였다. 행여 나는 이를 잊고 있었는데, 오늘의 나는 누군가의 기도응답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되뇐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시 29: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