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17. 3. 4. 07:19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잠언 4:25-27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1, 8

 

 

 

말씀이 그대로 말씀이 되는 걸 체험한다는 건 특혜다. 설교원고를 작성할 때나 묵상글을 쓸 때 내가 임의로 주도하는 게 아닌 데서 오는 이해는 즐거움이 크다. 자리가 불편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거나 자세가 영 불편해서 일어나 제자리걸음을 할 때도, 눈은 말씀에서 마음은 한 곳을 바라며 집중할 수 있다는 게 복되다. 점심을 먹으러 잠깐 집에 다녀오는 길에도 일부러 더 천천히 걸어 생각을 한데 모으기도 하였다.

 

어쩌다 아이 둘과 모처럼 카톡을 하게 됐고 여지없이 바쁜 일상의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한 녀석은 좀 공부를 계속 했으면 좋겠는데, 거래처 사람 접대하느라 며칠째 술을 마셨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러저러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고 하지만 어느 훗날 돌아보면 그게 다 부질없는 것일 텐데…. 4수 5수를 하다 포기한 셈이어서 더욱 마음이 쓰였다. 한 아이는 왜 그처럼 병적으로 열심을 다해 살까?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딱히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닌듯한데, 한참 나를 찾아오곤 할 때도 수녀니 스님이니 하는 이들과도 만나고 있다고 하여서 놀랐었다. 한데 아르바이트도 두세 개씩 하더니 직장도 어찌….

 

햇볕 고운 창가에 서서 아이들을 생각하였다. 주일을 권하고 예배에 오라해도 그저 푹, 하고 웃는 것으로 거리를 두는 정도였다. 설교원고를 출력하고 주보까지 만들어놓자 맥이 풀렸다.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었다. 4시 반에 초등부 아이들이 왔고, 뭐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나는 안정제를 먹었다. 굳이 다 알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때론 이해가 안 돼 주 앞에서 멍하다.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불쑥, 볶아치듯 하고 대체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꼬리를 물 때가 있다.

 

기껏 은혜 가운데 말씀을 다루고 그 풍성하심 가운데 즐거워하다 이 무슨 조화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까불거리며 말을 듣지 않을 땐 성가시고 짜증이 나다가도 자신들도 힘에 겨워하는 일상의 짐이 안쓰럽기도 하다. 엄마가 셋째를 가져서 요즘 좀 예민해요. 아이의 뜬금없는 발설에 웃음이 퍽, 터졌다. 아이들은 참 거침이 없다.

 

때론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행여 다른 데 한눈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의당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자칫 안이하였다가 그릇행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붙들어 세워야 한다.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마음은 어찌 다루기 힘든 것이어서 몸을 제어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굴기 일쑤다. 그러므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23).” 오늘 잠언은 그 의미를 뚜렷하게 제시한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는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24).” 말이 곧 씨가 되는 법이다. 그 말에 배부르다. 말이 몸을 이끄는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한 장치는 없을까?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10).” 말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말씀뿐이다. 주께서 내게 그 어떤 다른 은사가 아닌 ‘책 읽기의 즐거움’을 허락하신 데 감사한다. 읽고 그 의미를 묵상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신 게 말이다. 보면 이보다 기적은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해 책을 수백만원어치 들여놓으면 뭐하나? 정작 본인들은 진득하니 책 읽기 훈련이 안 됐다. 그러자면 혼자 있는 시간을 둬야 하고 이때 외로움은 숄을 두른 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남과 어울리는 시간은 줄고 혼자 하는 시간에서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진다. 아이들 걱정을 지청구로 늘어놓지만 정작 자기 문제는 모른다. 그럴 시간이 어딨어? 하면서도 어울려 놀 궁리는 한다. 그러니 책 읽기도 은사랄 수밖에. 주가 더하지 않으시면 시간이 날 리가 없다. 이는 성향의 문제도 아니고 기질을 탓할 일도 아니다.

 

관심을 가져오고 좋아하는 것을 회전하면 된다. 어떻게든 아이에게 그 재미를 알려주는 게 내 일이다. 워낙에 들뜬 시대다. 하다못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라도 해야 한다. 불안한 것이다. 카톡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은 외로워서 말을 건네는 게 아니다. 정말 저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당장 그게 아니면 할 게 없어서이다. 주체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하여 아무도 그 문제성을 짐작하지 못한다. 그리곤 저마다 하는 말이 바쁘다, 이거다.

 

두 아이와의 우연찮은 대화가 다른 기도 제목이 되었다. 물론 아이들이 주께 돌아오기를 위해서 항상 생각하고 또 기도한다. 더불어 주어진 날의 수고와 애씀이 고달프지 않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를 어떻게 알게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들리는 것을 어떻게 하면 보여줄 수 있을까? 두 아이의 이름을 노트에 적고 여러 번 밑줄을 그었다.

 

감사다. 기본은 어김없이 감사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내가 맡은 한 가지 일은 생각하는 것이고 저를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겠다. 이에 감사한 것은 오늘에 나를 두신 그 직분이다. 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저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따위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아이가 귀찮고 얄밉다가도 주가 저를 아끼신다는 데서 나의 태도는 달라지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시 145:10).” 감사가 빠진 자리에는 바쁘고 번잡한 수고만이 남는다. 애쓰고 또 기를 써야 살아남는 세상만이 주어진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늘 제자리다. 허무가 밀려올 땐 탄식뿐이다. 일에 보람을 찾느라 기진하였다. 한데 주의 성도들은 주를 송축할지라. 그 비밀의 열쇠가 오늘 시편의 말씀이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이 어찌 가당키나 한가? 평생을 수고하여도 이룰 수 없는 감사의 원리다.

 

그 비결은 오직 하나, 주가 하신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주가 하시게 하는데 필요한 제일 덕목은 홀로 좀 두는 것이다. 병적으로 바쁜 이들은 혼자 있는 걸 못 견뎌한다.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하다못해 TV 소리라도 크게 틀어놔야 한다. 누구라도 만나 시시덕거려야 살 것 같다. 이는 마치 미하일의 <모모>에 등장하는 시간도둑들, 회색신사들의 농간인 것이다. 시간을 저당 잡힌 사람들은 감사할 겨를도 없다. 저들이 말하는 감사는 우러나는 게 아니라 인사말 같다.

 

걷기 좋은 계절에 푸르게 물이 오른 양버즘나무를 보며 그 정직함 앞에 감탄하였다. 지으신 모든 계절의 것은 이처럼 주를 향해 감사하는데, 왜 아이들을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학원을 서너 개씩 돌려대고 왠지 시간을 주면 안 될 것 같은 부모들은 회색신사와 결탁하여, ‘널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라는 피켓을 들고 아이들의 시간을 도둑질하고 있다. 수업을 끝내기로 한 여섯 시가 다가오자 아이들은 불안하였다. 얼른 돌아가서 게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신경질적으로 돌변하는 아이들을 보며 아찔하였다.

 

그런 아이들을 독려하여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모른다. 있으면 있는 집 아이여서, 없으면 없는 살림 때문에 아이들의 시간은 저당 잡혔다. 기를 쓰고 당장의 쾌락을 좇는다. 단 일 분이라도 게임이 늦어지면 죽을 것만 같다. 그걸 위해 약속하고, 그래서 늘 억울하다. 그렇듯 수고하고 애써 부모의 합작품으로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한들…. 이제 직장에 들어간 녀석이 말했다. 맨날 술이다. 다음 날 서둘러 직장에 가는 것도 일찍 퇴근해서 술을 먹을 요량이다. 시시덕거리고 또 다른 게임에 저당 잡히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의 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기어이 망가뜨리고 쓰러뜨려 별 수 없이 두 손 들게 하는 수밖에, 내버려두면 답이 없다. 이는 모두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그 때문이다. 그저 성적이 우상이 되어 중학교 때는 좋은 고등학교가,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이 우상이 되었다. 그것만 이뤄진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기꺼울 것 같았는데 기껏 졸업하고 난 뒤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한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4-25).”

 

다를 바 없던 나를 오늘에 두심으로 그 안타까움을 아이들로 기도하게 하시는 데 놀랍다. 도대체 내가 누구 욕을 하고 흉을 볼까. 화가 나다가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주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여기에 두신 이가 또한 저 아이들을 보내심은 주의 사랑으로 ‘특이한 인물’이 되게 하신다. 그럼 하루 종일 혼자 있어요? 안 심심해요? 지겹지 않아요? 어린아이들의 눈에도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당장은 내 모습이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머잖아 주의 음성이 아이들의 마음을 두드릴 때 오늘의 내 모습이 저들에게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수가 계셔야 할 자리에 사역자를 두신다.’

 

두 아이 이름을 적고 밑줄 근 메모가 성경구절과 같이 있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