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3:3-4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시편 31:24
성경을 소리 내어 읽는 일은 복되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알겠는데 무엇으로 또는 안타깝다가 소중하다가 내 것으로 여겨지는 마음으로 벅차기도 한, 어떤,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어찌 논할 수 없는 그 무엇,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을 아는’ 알 수 없는 앎의 구별됨을 설명해주고 싶어 애를 태우는 것과 같다. 아집과 교만을 내가 깨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또한 쩔쩔매는 게 내 것으로 인한 것이라면, 기어이 할 수 없음을 두 손 드는 게 신앙일 거였다.
인위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무엇에 대한 회의가 요즘은 크다. 목사니까, 교회니까, 믿는 사람이니까, 하는 딱지를 떼는 일. 그저 자연스럽게 그리 느껴져서 그리 알게 되는 맛, 빛,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같은 생활 반경으로 드러나는 끄떡거림, 그럴 줄 알았어요! 하는 저들의 반응은 당연하였다.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주인집 딸내미가 오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서며 ‘목사님’ 하고 부른다. 입학을 했고, 뭐는 어떻고 하며 한바탕 수다를 늘어놓는데 새삼스러웠다. 아직 구분하지 못해 신발을 돌려 신고, 막내 티를 내며 혀를 감아서 말하는 아이의 어투가 얼마나 귀여운지. 그렇구나, 하고 호응을 하면 아이는 미주알고주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숨이 차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성도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을까?
주님과 같이 우리의 참된 양식은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설마 내가 이걸 알겠다고 말하는 순간 머쓱해지지만,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였다.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때론 아이가 문맥을 두고 운운하고 어떤 관념적인 혹은 추상적인 것에 푹, 웃음을 지을 때 슬프다. 정작 그게 아닌데 보란 건 안 보고 엉뚱한 데 시선을 두기 때문이다. 들으란 건 그러려니 하고 별 소리 아닌 데서 한참을 머물며 질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가 오고, 하려하고, 하고 있는 것에 놀랄 뿐이다. 뭐랄까… 이럴 거면 왜 오나? 싶은데, 와서 듣고 딴죽을 걸고 별 소리만 하다가 가는 것 같은데도 나는 그것으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살필 수 있어서 귀하다. 오고 안 오고야 내 소관이 아니라는 데서 자유로워졌다. 하고 안 하고도 내 몫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러는 동안의 나의 태도를 염려하는 것이다. 행여 나의 경험이 또는 상식이 성경을 압도하지 않기를.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해박한 달변의 은사보다 소중하다는 걸 깨닫는다. 어눌한 확신이 박학한 소견보다 옳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오스왈드가 될 수 없다.
바울은 바울일 뿐이고 모세는 모세였다. 나로 나를 여기에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 그것이 또한 나의 양식이 되기를 주께 바라였다. 그처럼 소리 내어 성경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어느 대목에서 나를 붙드시는 데 놀랍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아! 예수님의 말씀을 바울은 이렇게 확신하였구나!
점심을 먹으며 나는 아이에게 소리 내어 또박또박 성경을 읽기를 부탁하였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신중할 것은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는 행위다. 그럼 생각도 느낌도 깨달음도 모두 성령이 하신다. 다만 그리 순종할 때는 말이다. 성경을 몇 번쯤 읽으셨어요? 뜬금없이 건너 온 사장이 물었다. 계면쩍어서 나는 뭐라 답을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러다 불쑥 한다는 소리가,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런 내 말에 그이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들어앉아 성경만 읽으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툴툴거렸던 나의 어리석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하루 일과는 단순하여서 뭐라 말해줄 게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마다 하세요? 아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름 일과표에 따라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공휴일에도 나오세요? 왜요? 연거푸 이어지는 질문에 딱히 왜 그런지는 말할 게 없었다.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 아침엔 성경보고, 오후엔 책 읽고, 누가 오면 얘기 나누고, 아이가 오면 수업을 하고, 늘 같은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게 저들 눈에는 신기한 모양이다. 하긴 혼자 있으면서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은가? 참 부지런하세요! 하는 청소아주머니의 말에 이어 조산원 이모님도 그리 인사를 하였다. 내가 그런가?
엉덩이가 아프면 눕고 어깨가 결리면 일어나 앉는다. 언제부턴가는 억지를 다해 하는 게 안쓰럽다. 사업이 어떻게 어렵고, 옆방의 누가 안 나가고 계속 하기로 했고, 큰 애가 이번 주 토요일부터 글방에 올 거고, 자신이 아들에게 바라는 건 뭐고… 저 혼자 또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있네요? 하고 저는 멋쩍어했다. 이렇듯 나는 그냥 있음으로 되어지는 모든 것들에서 하나님의 섭리도 그 뜻도 헤아려 아는 데 놀라울 뿐이다.
선생님은 언제부터 글을 잘 쓰셨어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어요? 이제 중학교에 올라간 녀석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러게 내가 글을 잘 쓴다기보다 좋아하게 된 게 너처럼 중학생이 되었을 때 한 여자애를 좋아해서였나? 나의 말에 아이의 반응이 빨랐다. 그랬던 것 같다. 책 읽기는커녕 철자법도 변변하게 구사하지 못하던 때에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앤 참 편지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걸 받고 답장을 해야 하는데, 별 수 있나? 그냥 읽고 그냥 쓰는 수밖에. 쓴 걸 또 읽고, 아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그게 좋은지 싫은지 따질 겨를이 어디 있었나? 그냥 좋은 거지.
글은 잘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거야. 아이에게 말해주면서 새삼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마음도 삶도 그러하지 않나? 생각하였다. 특별히 뭘 잘해야 하는 게 어디 좋아서일까? 싫어도 잘하는 것이 못해도 좋아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전기문을 읽으면서 한편으론 부러웠지만 한편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그리 살지는 못하겠다 싶었다. 물론 전기문이란 게 후대의 존경과 귀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글이어서 그렇겠으나 방귀 좀 뀌고 똥냄새도 나는 거지 어찌 청옥같이 은은하기만 할 수 있을까?
티격태격 아내와 시비가 붙을 때면, 툴툴거리는 나의 말투와 신경질적인 성품에서 환멸을 느낀다. 이런 걸 누가 알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숱하게 다짐해도 그게 또 돼먹잖은 소행이라 툭하니 불거져 나오는 데야 죽을 맛이다. 미숙하고 어리석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나를 혹시나 과대포장하고 사는 건 아닐까? 하고 주의하지만 것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수는 주 앞에 정직한 자로 살자는 것. 어버버거리는 바보로 정직한 게 능숙하여 자신마저 속이는 어리석음보다 낫다.
그렇게 잘 살아서 뭐하게? 정작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는 일만 남았다. 성경의 원리는 간단하다. 듣는 자는 살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 문장에서 핵심은 ‘죽었니 살았니’가 아니라 듣는다는 것이다. 듣는다는 건 사랑의 정점이다. 누굴 좋아한다는 건 듣는 자리에 드는 것이다. 볕이 창가에 듣듯 내 안에 스미는 빛이 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마음을 거기에 듣게 하는 일이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듣게 하면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강하고 담대하라.’ 그럴 수 있는 건, 인자와 진리가 내게서 떠나게 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목에 매고 마음에 새긴다. 옳고 그름을 따져 억지를 다하는 게 아니라, 그리 여겨지는 마음은 ‘여호와를 바라는 마음’이 한다. 내가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면서 그처럼 싫어하던 책 읽기와 글쓰기가 고달프게 달달하고 피곤하게 즐거웠던 것과 같다. 저절로 그리 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의도해서 주께 또는 사람에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게 아니었다. 내겐 다만 인자와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3-4).” 목적이 사라지는 목적이다. 뭘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거두는 목적이었다. 예수님의 일상적인 삶의 배경이 그러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뭘 의도하고 억지를 다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시 31:24).” 왜냐하면 우리는 다만 주께 피하고 그의 공의로 안도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1).” 이로써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0) | 2017.03.05 |
---|---|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0) | 2017.03.04 |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0) | 2017.03.02 |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0) | 2017.03.01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0) | 2017.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