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편 37:7-8
사랑한다는 건 마음이 머무는 것으로, 그리 되는 신비의 영역 같다. 의도한 것도 아니고 힘들여 인위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남들은 대단하다 하는데,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보다 자연스러운 게 없을 정도이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세계가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을 입는다.’는 오늘 잠언의 말씀도 밖에서 들으면 부당한데 안에 있으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할 말이 없다. 그 뚜렷한 현상은 간절함으로 찾고 찾음으로 만난다.
이를 밭에 숨긴 보물을 찾은 어느 농부의 비유로 또는 귀한 진주를 발견한 어느 진주장수로 비유하신 게 아닐까? 저들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르다의 퉁명스런 불만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느낄 수 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그런 증상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41).” 그래서 과도한 열심은 불의에 가깝다.
아이가 뚱해 얼굴이 항상 화난 사람 같다. 얼굴은 순 우리말로 ‘마음의 꼴’이다. 그러니까 그 마음의 표정이고 정신의 모양이다. ‘얼’은 정신과 혼, 마음을 나타낸다. 사춘기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이는 실제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저절로 드러나는 방어기제와 같다. 가인의 표정이 그랬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 4:6).” 얼굴에 늘 수심이 가득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밝은 표정은 그 정신의 문제를 가늠하게 한다.
뭔가 불만이 많은 중2 아이를 마주하는 일은 어렵다. 대놓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고 해결이 될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고 좋은 것만 주어 마음을 살 수도 없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을 가르쳐 훈계하기보다 그 마음을 적당히 풀어놓을 수 있게 해주는 게 일이다. 학교에서 늦게 끝났다고 뚱, 쓰기 싫은 걸 억지로 써야 하다니 뚱, 거짓말을 해서라도 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뚱, 이래저래 그 표정이 뚱한 걸 뭐라 이른다고 펴질까?
아래층 아이엄마는 뜬금없이 전화를 해서 아이를 깨워 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아내는 한술 더 떠서 2학년도 진단평가를 본다면서 아이를 달래 공부를 시켰다. 그냥 내버려 둬! 나는 아내의 고생이 안쓰러워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는 애대로 애 엄마는 애 엄마대로 참 너무한다 싶어서 말이다. 살만하면 모른 체하다 아쉬우면 곡소리를 낸다. 그런데 아내는 불쌍하잖아, 안됐잖아, 하면서 아이를 건사한다. 되바라진 아이는 그걸 이용해 먹을 줄 안다. 영특하여서 말을 지어내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싸가지가 없다. 벌써부터 못하는 게 없다. 학교에서도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나는 옹졸하여서 뚱한데 아내는 그럼에도 아이를 챙겨 밥을 먹이고 시험을 대비시킨다. 돈 받고 하는 일이면 게 더 구차스러울 뻔하였다. 하나님이 두시는 그 마음을 나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돈이 없어 교육비도 못 내고, 그래서 부담스러워서 아이를 못 보내겠다는 사람이 며칠 전 백만 원을 들여 강아지를 샀다. 피아노학원을 보내고 태권도도 새로 신청을 했단다. 도무지 나는 이해가 안 되고 마음이 뒤틀려 저들을 생각하면 밝은 표정을 짓기가 어려웠다. 한데 뜬금없이 애가 학교엘 가지 않았다면서 이른 아침에 전화를 해서 아이를 챙겨 학교에 보내달라니! 걸 또 오후에 불러서 주중에 있을 진단평가를 대비시킨다니!
속 알 딱지가 밴댕이 같아서 그런가,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뭔가 화가 나고 괘씸한 것이다.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사 3:9).” 아놔! 딱 내 표정이 그런 게 아닌가? 퉁퉁거리듯 아내에게 뭐라 하면, 그럴 수 있지! 그럼 어떡해? 하고 자신도 마음이 불편한 건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아내는 거절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퉁명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말씀 앞에 앉을 때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로 인해서 불편하다. 왜 나는 너그러울 수 없는 것일까? 애도 애 엄마도 마뜩치가 않은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고 배알이 꼬인다. 그런데 그러는 내가 또 못 봐주겠다. 그렇다 해도 그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알면 계면쩍어진다. 송구한 것이다. 그런 나였고, 누군가에게 그런 자식을 둔 어미로서 나의 어머니도 밉상이었을 것이다. 보면 늘 나 같은 사람만 내 곁에 두신다.
넌 얼굴이 왜 그리 죽상이야? 하고 중2 아이에게 물었다가 그 표정과 다르지 않은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넌 애가 왜 그러니? 하고 나무라다보면 나 또한 못지않은 걸 깨닫는다. 참나! 이를 마주하는 게 유쾌하지는 않다. 괜히 나한테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까 뻑하면 아내에게 화를 낸다. 제일 만만하니까 말이다. 이를 환치라 한다. 동에서 뺨 맞고 서에서 화풀이 한다는 식이다. 가인에게도 그런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3-5).” 나름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 거절당했다고 느낀 그는 그 화를 동생에게 환치시킨 것이다. 그런 내게 실망하고 한심해서 화가 나는 걸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여 저를 대신 못마땅해 한다. 너 때문이다. 그래서 깡통을 걷어차고 괜한 데 화풀이를 하게 된다.
어제는 그렇듯 하나님이 내게 시청각교재를 사용하시는 것 같았다. 왜 아내에게 화가 난 것일까? 왜 저 애가 괜히 미운 것이지? 길을 걷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누굴 흉보고 욕하다가 알았다. 그게 나였구나! 나를 닮은 사람이 아니라 그런 내게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우스운 게 나는 너그러워지고 싶다. 인자하고 온유하였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목사답고 싶고 주의 말씀에 흠뻑 젖은 자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늘 드러나는 건 흉측한 몰골이다. 강퍅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뿐이다. 내가 봐도 못돼 처먹었다.
그래놓고 말씀 앞에 앉으려니까 이처럼 불편한 것이다. 참 내가 못됐다.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은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그렇구나! 내가 그만큼 주를 사랑한다는 게 너무 인위적인 것이었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하는 소리는 너무 돼먹잖은 고백이었다. 그래놓고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5).” 그게 나와 다를 바 없었다.
어디가 아프고,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고, 사람은 늘 예측을 빗나가고, 그 모양이 그 모양인 것 같고,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아서… 그런 와중에 아래층 아이엄마는 뻔뻔하기도 하지! 애는 또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는 거야? 뚱한 마음을 숨기느라 굳은 표정을 짓는 것이다. 얼굴에 다 표가 난다. 불만이 가득한 것이다. 내 마음의 꼴이 이 정도인 거였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공연히 아내를 트집 잡아 골을 낸다. 아빠 왜 화났어? 딸애의 말이 찌른다. 화는 무슨 화? 이미 화를 냈다.
저녁에 같이 만나 멸치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올라왔다. 느릿느릿 걸으며 나의 됨됨이에 치를 떨었다. 내 속을 낱낱이 다 보여주고 산다면 아무도 내 곁에 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나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간절히 주를 찾는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오늘 잠언의 말씀을 연거푸 되뇌다 보면, 시편의 말씀이 나를 진단하는 것 같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그리고 처방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이런 나의 증상의 원인이 뭘까?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아, 나는 나름 도리를 지키고 선을 행하며 잘한다고 하는데, 저들이 너무 예의가 없구나! 싶은 것이다. 나에게 어찌 그럴 수 있어? 싶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었다. 원하고 바라는 것에 비해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데 가 있으신 것 같으니까, 서운하다가 또는 억울하기도 한 것이다.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리며 피식, 웃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어렵다. 내가 제일 웃긴다.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제일 한심하시고 말이다. 어찌 나 같은 자를…. 한데 그런 내가 아래층 아이엄마를 안타깝게 여길 줄 모르고, 이를 안쓰러워하는 아내에게 도리어 퉁명스럽게 짜증을 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죽자고 가인과 다를 바 없는데 하나님은 또 죽자고 나를 돌보시며 사랑하시는 거였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자고로 ‘낙하산과 얼굴은 펴져야 산다.’ 공연한 나의 굳은 표정이 오늘 내 마음의 꼴이었다. 말씀 앞에서는 이처럼 사모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그 꼴이 가관이었다. 누가 누구더러 욕하고 흉보고 비판하는지 모르겠다. 바울은 그런 나를 구별하여 바로 할 것을 거르친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너는 그러지 말아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것에서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그리하여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시 37:37).” 말씀을 상고하고 이를 붙들고 불 가운데도 섰던 주의 사람들을 살핀다. 저들의 정직함을 볼지어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26).” 그래서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었구나! 그러니 이를 어찌 할까?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4).” 결국 청결함이란 나를 깨끗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더럽다는 것을 주께 아뢰고 그 앞에 정직하는 거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그와 같을 때 온유하였다. 저의 땅은 영원하였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내 의지로 그리할 수 없음을.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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