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언 6:23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편 35:1
바울의 사역이 항상 성공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행 17:32-33).” 하지만 실패가 저를 막지는 못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28:23).” 모두가 호의적인 건 아니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24).”
때론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당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26:24).” 하지만 그의 중심은 분명하였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3-14).”
와야 할 아이와 왔으면 하는 아이에 대해 늘 마음은 안타까워서 서럽기까지 한 것이지만, 날씨 탓이었겠거니… 몸까지 찌뿌둥하여서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마침 딸애가 공부를 시작해서 오후 늦게까지 교회에 남았다. 누워서 책을 보는데, 앞서 저 대목이 왜 눈물겹도록 위로가 되는 것일까? 승승장구하며 모든 걸 구김 없이 잘해낼 줄 알았던 바울도 그 실패가 절망이 말이 아니었구나! 그럼에도 저를 붙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행을 마치는 동안 그렇게 애를 태우던 아이가 3월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예배에 좀 나오려는가? 했고, 퇴원을 해서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 연락을 했던 녀석이 ‘네, 갈게요.’ 한 말에 주일을 기다리게 하였고, 인천 모 대학 교직원으로 취업했다는 소식에 덩달아 기뻐했던 아이가… 제대를 했을 누구와… 혹시나 누구를 떠올리는 마음에 나는 기다리다 병이 들겠다. 그러니까 내게 왜 ‘이와 같은 기다림’을 주시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심’으로 때로는 이보다 잔인한 것도 없을 듯하다.
우울한 건지 몸이 나른한 것인지 그저 까부라지고 있을 때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내 마음의 방향성을 새삼 일깨우는 것 같았다. 이에 근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하는 바울의 설교가 마음을 강하게 붙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곧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였다.
참 신기하지? 하필 딱 그 대목에서 그 내용을 손에 쥐어주시며 읽히신다. 나는 늘 느끼지만 나의 책읽기보다 직접적인 임재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생각함으로 기도하고 기도함으로 주를 의지하는 것. 안달하고 볶아대는 마음이야 별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것으로 서운해 하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주를 더욱 바라는 마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어서 어떤 확신,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단 하나, 내가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날 위해, 우리를 위해, 그러므로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애들이 날 어떻게 대하든 그게 뭐 대수겠나? 부디 나를 저들 곁에 두시고 우리가 연결되는 동안에 주의 사랑의 강권하심이 나를 붙드신 것 같이 저 아이들에게도 동일할 수 있었으면…. 때론 몹시도 외롭고 우울할 때 오늘 다윗의 기도를 읊조린다.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 35:3).” 그와 같은 증거가 습관처럼 그저 펼쳐든 책에서 바로 그 대목을 읽게 하시니까 놀랍다.
울적한 마음에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13).” 사실은 나에 대한 기도는 그리 많지 않다. 늘 같은 내용이라 아뢰고 구할 게 다르지 않다. 한데 내 안에 두시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그로 인한 기도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그 이름만 적어두어도 마음을 가득 채운다. 한데 그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럴 때 화들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부담도 컸다는 것.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실은 꽁한 마음으로 팽, 돌아누울 땐 쟤들이 오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러다 어떻게 되든 말든 날더러 어쩌란 건가? 그래 맘대로들 해라! 하고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다가 다시 보면 마음은 저 혼자 기쁘고 들떠 또 다시 기대하며 전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쪼록 주 앞에 설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까지 그래서 내가 온전해야 하는 이유였다. 무던히 또한 묵묵히 내게 맡기신 자리에 있는 것. 그럴 수 있게 실은 하나님이 흔드신다. 사탄이 그러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나를 무장시키신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눅 11:21).” 내 안의 불화는 나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심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아! 성전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힘은 편안함이 아니었다. 긍정적인 마음이나 안이한 희망도 아니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오늘 잠언은 이를 분명히 가리킨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고난을 피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게 아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리에서 그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었다. 단지 병 낫기를, 눈을 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에게 있어 풍랑이 주님만 보고 그 위를 걷게 하였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마 14:28).” 비록 또 금세 물살에 놀라 빠져들긴 했지만 이내 손을 잡아주시는 것도 주님이셨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내 안에 두시는 이런저런 마음과 실제 현실로 드러나는 미미한 변화에 대해서는 낙심할 수밖에 없으나 ‘즉시 손을 내밀어’ 주가 붙잡으신다.
나를 걸려 넘어지게 그냥 두지 않으신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25).” 주가 하신다. 외조카아이가 식사를 하면서 ‘가족 예배네요.’ 하는 말이 왜 그처럼 서운하게 들리던지. 이러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어떤 서글픔 같은 게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렇듯 마음은 주저하고 까부라져 저 혼자 시무룩하고 있을 때,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여기까지 오게 하신 이가 어찌 남은 길을 함께 하지 않으실까?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2).” 저들에게 나의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저들 각자의 하나님을 알게 하고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나에게 어떠어떠하셨던 그 하나님이 저들에게도 동일하시다는 것을 말이다.
이를 통해 주의 뜻을 알게 하시려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그렇구나! 내 안에 두시는 불편함이 생활의 곤고함이 육신의 어려움이 궁극적으로는 주의 영광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 교회를 이뤄가고 성전으로 세워져간다는 게 외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를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이와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되뇔 때 비로소 알겠다. 내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린 그림을 위한 게 아니다. 보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우리는 서로 지체되어 주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나와 싸우는 것들과 싸우소서. 나를 거꾸러뜨려 항복을 받으려는 것들로부터 보호하소서.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시 35:1).” 이에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27).”
그러므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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