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전봉석 2017. 3. 7. 07:41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잠언 7:13-15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시편 36:10

 

 

 

우리 안에 ‘그 여인’이 붙들기 시작한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스스로 일러, 나는 할 만큼 했다고 떠든다. 하나님 마음에도 쏙 들 화목제를 드려 서원도 갚았다고 한다. 나름 이만하면 됐지,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은, 마치 천생연분인 것이다. 명분이 중요하다. 좋으면 된 거다. 네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됐다. 서로를 격려한다.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잠 7:8).” 그럼 됐지 뭐 있나?

 

아는 자가 취한다. 취한다는 건 다른 걸 포기할 줄 안다는 것이고, 그에 따른 불편과 원성도 기꺼이 감수한다는 것이다. 귀하다는 걸 알 때 그 나머지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모르는 데야 별 수 있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곧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고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웬일로 아이가 전화를 주었다. 퇴원 후 상태가 어떤지 말해주었다.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병원에서 약을 늘려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울과 불안과 양가감정이 존립하는 것이다. 양가감정이란 좋으면서 싫은 감정이다. 엄마가 좋은데 밉다. 이 일이 귀한데 끔찍이 싫다. 그런 아이에게 ‘주 앞에 나올 것’과 ‘글을 쓸 것’을 부탁하였다. 우선은 주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원인은 죄다. 같이 기도하며 주께 의뢰하자고 하였다. 어려움은 그러라고 주신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직면하라는 것이다. 회피하지 말고, 왜곡하여 재생산하지 말고, 정직하게 분석하고 마주하여 자기 안의 ‘양치기 소년’을 다스리자는 것이다.

 

꽤 긴 시간 통화가 이어졌다. 오후 네 시가 다 돼 그때 자려고 누웠다는 것이다. 무슨 고기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술은 끊으려고 며칠 됐고, 친구들을 만나 너스레를 떠는 일도 시들해졌고, 엄마의 반응은 짜증스러워졌고… 결국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더 가야 할 일인가? 답답한 마음에 뭐라 한들 말은 저 혼자 겉도는 것 같았다. ‘와 봐라. 해보자.’ 하는 나의 권면이 어디 자발적으로 들려질 소리던가! 죽겠으니까 도로 자꾸 병원에나 입원해 있었으면 좋겠는 것이다.

 

뭐라 한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덴 고달프기만 하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 120:7).” 죄란 그런 것이어서 하나님 쪽으로 가까워지는 게 싫은 것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109:4).” 그러니 어쩔까?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하고, 그런 자신에게 휘둘리지 않게 고통스럽지만 직면하고 다스리라고 권하고, 알겠니? 알겠니? 하면서 아이를 위해 기도할 뿐이다.

 

아, 주님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는 거구나.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별 수 없다. 그러기까지는 굴러야 하고, 떨어져야 하고, 깨져야 한다. 그러는 동안 자꾸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하여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까불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보다 더 악한 교만이 있을까? 설마, 하는 건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으로 정조준 하는 것이다. 풉, 웃는 데 서러웠다.

 

통화가 끝나고 나야말로 급 우울해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말이다. 속상하고 답답한데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다. 오전에 읽은 ‘예수님의 태도’가 생각났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 19:10).” 폭군이라 해도 그 뒤에 계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에 순복하는 거였다. 따르고 지지하던 자들이 민족의 지도자로 저자 선봉에 서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감정을 따르지 않았다. 군중의 논리와 배치됐다.

 

그 일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조급하여서 아이를 당장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뭔가 가시적인 효력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 아이를 어떻게 주 앞에 나오게 할까? 말로 설명하고 내 경험을 들추어 대비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들 먹히지도 않고 오히려 실망만 더할 뿐이다. 어쩌면 아이와 통화하고 오후 내내 우울하였던 내가 무서운 교만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우울감이다.

 

아이를 통해 나 또한 벗어야 할 내가 많다는 걸 느꼈다. 모세가 자기 열정으로 민족을 도우려할 때 살인자가 되었을 뿐이다. 때가 찬 후에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주가 하신다. 이를 못 참고 내 안의 ‘그 여인’은 오늘도 수시로 들먹거리는 것이다. 내가 이만큼 화목제를 드려 서원도 갚았다. 이제 희락하자.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내가 이 날을 기다렸다…….

 

오늘 잠언의 말씀이 새삼 그게 나였구나, 하는 걸 마주하게 하신다. 들쑤셔 뭐라도 하게 하려는, 본색을 드러내는 데 있어 타당한 논리와 설득으로 내 안의 영을 꼼짝 못하게 한다. 이에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23).” 부추기는 내 안의 음녀를 나를 감당할 수가 없다. 마주하면 할수록 도무지 손 쓸 수 없다. 그래서도 기도할 뿐이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2).”

 

아이의 병적인 상태와 내 안의 ‘그 여인’과 닮았다. 이를 어찌할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당장은 휘둘리고, 도대체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인 것 같지만 주는 그것으로 주님을 알게 하신다. 최소한 나는 아이와의 통화에서 그 후 밀려드는 우울감에서 더욱 절실하게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었다. 아이도 그러하기를, 그럴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주만이 우리의 친구시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이에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을 바로 알 수만 있다면,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36:10).”

 

다 저녁에 막내 동생이 수원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다. 동분서주하는 그의 발길이 안쓰러웠다. 뭐라도 줄 게 없어 마음이 쓰였다. 이래저래 괜히 울고 싶었다.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 말이다. 툴툴거리는 아이에게 늘어지듯 당부를 한들, 늘 바쁘게 돌아치는 동생에게 뭐 하나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어쩔 땐 그냥 훌훌 벗어버리고 싶어서, 그런데 뭐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라… 우울감은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할 수 없는 것들에 부딪쳐 느끼는 진동이다.

 

괜히 입에 댓 발 나와서 돌아누웠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 말씀, 변덕인가 싶게 알 수 없는 평안이 나를 새롭게 하신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주가 하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곁에 두심으로 내가 저에게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로 인해 내가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은 확실하였다.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온다고 하였으니, 글쎄. 주일에도 오겠다고 하였으니, 글쎄.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바라고 구하는 건 교만이다. 그것으로 우울해진다. 주신 바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게 곤한 잠을 주셨다. 이 아침,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오늘 다윗의 기도가 내 것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