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언 19:17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4
아이가 엄마 등쌀에 결국 글방을 끊기로 했다. 시키는 게 너무 많아서 말이다. 나도 더는 뭐라 말하지 않았다. 실은 아이 마음에도 좀 더 놀고 싶은 것이다. 것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는 거야. 아내와 산책을 하며 말하였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온화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교회를 생각하고 아이의 영혼을 생각하면서부터는 공연히 마음 쓸 일이 더 많아졌다.
토요일마다 초등부 아이들이 와서 일기를 쓰고 독서록을 쓰고, 어제는 바닥에 주저앉아 공기시합을 하다갔다. 나는 아이들의 글을 읽어보고 과자를 주고 물을 주었다. 친구랑 같이 가도 돼요? 아이의 문자에 반은 싫고 반은 좋았다. 다음 시간엔 동생도 같이 와도 돼요? 엄마가 없으면 혼자 있어야 하는데. 괜찮다, 그렇게 해라. 나도 모르겠다, 이제 안정제를 먹지 않고도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
이를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라 여겨도 되는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선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뻔스러워서 말이다. 나도 잘 안 돼. 그래서 자꾸 화가 나. 좀 더 너그러웠으면 좋겠는데, 당장 내 코가 석 잔 거야. 아내에게 말했다. 실은 아내가 힘들어하는 대목이기도 하였다. 그 일로 자주 부대끼고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내가 못하는 걸 너는 왜 못하냐고 성화를 부리는 꼴이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지내자. 나는 바보처럼 말했다. 우리가 다툴 일이 아니었다. 못난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기로 하였다. 마트에 들러 버섯곤드래 밥을 먹었다. 간장이 풍미를 더하고 버섯의 질감이 오래 씹는 맛을 더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선한 일을 하게 하시는 게 아니라 주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거였다. 결국 우리가 잘하니 못하니 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주님께 얼마나 그 책임을 돌려드리는가 하는 것이다. 왜 자꾸 우리가 책임지려 하는 것일까? 아이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걸 고백하였다. 못 믿겠는 것이다.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이 도대체 뭘 믿는다는 거야? 하고 말하려다 내 목에 걸렸다. 애 하나 있는 걸 그렇게 못살게 굴 듯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간섭하려고 드니까 애가 진이 빠진다.
이제 갓 중1이 되었는데 늘 아이의 마음에는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전날에 아이 아빠가 따귀를 때렸다고 했다. 엄마의 병적인 간섭은 알고 있었지만 애 아빠까지 아이를 학원에 데려가고 레벨 테스트를 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그리했다니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저들은 교회를 간다. 그 마음에 없는 하나님을 먼 교회에서 찾으려는 것인지. 그와 같은 얘길 아내에게 전해 듣다가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긴 한숨만 내쉬었다. 자신들이 애쓰고 수고하는 만큼 자식의 성적으로 보상을 받고 싶은 것이다. 아이의 병이 깊어갔다.
라면을 끓여주자 아이가 아내 손을 잡고 너스레를 떨더래나…. 고마운 것이라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뿐이었다. 글방에도 조그만 냉장고를 들여놓았는데 순전히 아이스크림을 넣어두기 위해서다. 다행히 50% 싸게 파는 것이어서 매주 열 개 스무 개 채워 넣기 무섭다. 아내는 돈 때문에 걱정이고 나는 그런 것까지도 주께 맡기자고 너스레를 떨지만 실은 나도 걱정이다. 걱정이란 하나님이 못미더운 데서 오는 자기방어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이사야의 설교는 깊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사 59:15-18).”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이다. 악을 떠나서도 성실이 없고 공의에 기뻐하지 못할 때 그 열심이 탈취를 당한다. 중재자가 없다. 그래서 자기 팔로 스스로 행하신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하였다.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14).” 우리에게 저 아이들을 맡기신 데 따른 불안과 염려는 결국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감당하게 하시는 만큼 그 자리에 있으면 되었다. 주가 갚으신다. 감히 선행이라 말할 수도 없지만, ‘그에게 갚아주시리라.’
염치없게도 오늘 잠언의 말씀을 여러 번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나? 아이가 선생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그와 같은 너스레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지 않나? 어쨌든 등 비비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우리를 두신 이유였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며 별 것도 아닌 이야기로 또 서로 예민해졌다가,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기로, 그것만이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음을 다짐하였다. 이렇듯 참 신기한 건 우리가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워간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근심이 주를 아는 능력을 배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의 다툼은 결국 고집 센 자신의 자아와의 모진 싸움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말 그대로 주님만 의지하는, 아이가 자기를 낮출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전폭적인 마음이어서이다. 그리하여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눅 18:17).” 재고 따지고 의심하고 비교해서 자기 판단으로 어찌 좀 해보려는 동안에는 어림없는 소리다. 그러느라 연신 안달이 복달되고 서로를 들들 볶아서 이내 같이 못 살게 만드는 꼴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 같이 받는다는 건 순수하게 그걸 다 믿는 것이다. 그러자면 자기 판단과 기준이 물러나야 한다. 이에 주의 정의와 공의를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더 어렵고 힘들 때, 아니 이제 죽었구나 싶을 때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잊지 말자. 여기까지 함께 하신 이가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실 리 없지 않나? 애들을 더 받아서 수업을 늘리고 수입을 보장 받는 게 목적이 아니라 곁에 두신 한 아이를 놓고 씨름하자. 능력주시는 대로 하는 거야. 나는 아내를 다독이듯 내 자신에게 말하였다.
전날에 선생은 그런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나의 설명에 혀를 찼다. 그저 막연하게도 네가 편안하다니까 됐다, 하는 소리로 응하여서 공허하였다. 아무리 설명한들 저들은 못 알아들을 소리다.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책임은 없다.’ 나는 아내에게 이 말을 설명하면서 그래서 믿음이고 그래서 무모한 것이겠구나, 생각하였다. 우리는 다만 주의 이름으로 행할 뿐이다. 살 뿐이다. 맡김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 책임을 왜 우리 자신이 지지 못해서 안달을 부리는 걸까?
아이엄마의 병적인 기대도 그 수고와 애씀도 결국은 하나님을 못 믿겠으니까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 아닌가. 아이를 닦달하고 아이는 그 등쌀에 거품을 물고 있는데도 그것이 부모의 도리인 것으로 알고 아이아빠는 길거리에서 아이 따귀를 때리면서까지 닦아세우는 것이다. 믿는 자란 그 믿음의 값을 자신이 챙기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가 아니라 그것까지도 잊음으로 주께 모두 맡기는 게 믿음이었다. 책임은 주가 지신다. 내가 지려하는 건 믿음이 아니었다.
그러느니 우리의 수고는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무서운 일이다. 자식도 돈도 자기 건강도 수고도 애씀도 성실한 노력까지도 내가 주께 초점을 맞추는 데 아른거리는 모든 게 죄악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이게 말씀이다. 내가 의지하고 붙들고 승부를 봐야 하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명은 주께 맡기는 일이지 내가 어찌 뭘 해보겠다고 설치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우리에게 두시니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저들을 사랑하는 것뿐이어야 한다. 가난도 질병도 모진 고난의 역경도 때로 주님은 부러 더 맡기신다. 체험은 삶이다. 뭔가 기가 막힌 체험이 삶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체험이 될 수 있다. 별 거 아닌 일에서도 하나님은 수고하신다. 체험은 단회적일 수 있으나 삶은 지속적인 것이다. 삶이 매순간 체험이다.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하는 걸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이 주시는 체험도 없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과 일심으로 사는 게 복이다. 그저 주께만 집중하는 것으로, 내가 뭐 꼭 저 애에게 뭐가 돼야 하는 건 아니다. 오늘은 우리 곁에 두심으로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저 애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께 집중한다는 건 두신 바 오늘을 사는 일이다. 이는 체험보다 깊고 은사보다 귀하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아 그렇구나. 고통을 모르는데 어찌 기쁨의 진가를 알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란 나를 죽여서 나로 하여금 살게 하는 일이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온전히 심판을 기다리는 자는 날마다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던 자이다. 억울한 여인이 공정한 심판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아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는 날도 올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자신할 수 없어서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란다.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나는 과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며 살 수 있을까?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할 수 없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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