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잠언 20:28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12, 20
다른 주일과 달리 아이들이 많이 온다는 말에 마음이 들떠 있었나? 점심으로 준비한 불고기 전골은 반 이상이 남았다. 하필 아버지가 오셔서 ‘중생, 영원의 거듭남’에 대하여 설교해 주시는 날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못 온다는 연락이 오고 아예 연락도 없이 안 오고, 그러니까 나는 번번이 속는다. 와야 오는가보다 해야 하는 것을 너는 그때마다 또 기대하고 기다린다. 그러다 큰애마저 몸이 좋지 않아 못 온다는 문자를 받고 급기야 슬그머니 안정제를 꺼내 입에 물어야 했다. 이러니 나를 어쩌면 좋을까?
아버지에게 송구해하던 나의 마음과 달리 전혀 개의치 않고 설교를 하셨다. 이를 ‘허물과 죄’로 인한 것임을 곧 우리의 자연적인 연약함(허물)이 항상 죄로 우리를 이끄는 것에 대하여,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리하여서 거듭남이란 사람으로는 사람을 이끌 수 없으며 오직 성령으로라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우셨다.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아이들이 오고 안 오고에만 연연해하고 있던 것을 회개하였다. 그와 같이 아버지의 의연함과 유연함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돌아가고 딸애도 공부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미녀와 야수’를 보러 간 뒤에 나는 혼자서 막연하였다. 소파에 널브러져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무심히 책장을 넘기는데,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 모세에게 이르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도 들렸다. 참 말씀이 실제적이다. 나는 단순하여서 새로 무얼 하는 데 두려워한다. 딱 그만큼 그때마다 읽고 있는 책으로 혹은 저가 인용하고 있는 말씀에서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이 확실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에게만 들린다.’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삐쭉, 입을 오물거리며 다시 읽다 울컥하였다. 그렇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성경이 굳이 말씀으로 다가오겠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시는 게 말이다. 오늘 날에도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들을 귀 없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와서 말해주어도 듣지 않는 법이다.
나는 그때마다 이처럼 확실히 말씀하시는 걸 듣는다.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겔 1:3).”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한심하고 처량한데 그때마다 말씀으로 들려주시니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오겠다던 아이들로 들떠 있다가 주일 아침, 이래서 못 오고 저래서 못 간다는 문자가 들어올 때마다 나의 ‘따귀 맞은 영혼’은 우울하였다.
아이들을 보고 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아이들이 오고 못 오고에 따라 이처럼 마음은 들썩거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본심을 감출 수 없어서 아이들을 사랑하되 저들로 연연해하는 목회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고 저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되 그게 목적이 아닌 것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은 저를 누구보다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지 저와 같이 하는 정 때문에도 아니고 저의 됨됨이가 좋아서도 아닌 거였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주의 음성이 선연한 빛깔로 내 마음에 새겨졌다. 행여 나의 수고와 애씀이 주객(主客)이 전도된 일이어서야 되겠나?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22).” 나의 마음씀과 속상함이 주의 뜻을 온전히 바라고 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돌아보아야 했다.
아이들이 그리운 건지 저들 영혼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인지, 저들 영혼을 사랑하는 건지 주의 영광을 사모하는 것인지, 나는 어둑한 글방에 남아 오래오래 생각하였다. 마음을 둘 곳 없어 애꿎은 책장을 들춰서 청소를 하였다. 소파를 옮기고 책상을 옆으로 밀고 먼지를 떨어내고 바닥을 닦았다. 금세 땀이 배고 몸의 피로감은 가중되었다. 하나님은 결코 광신적(狂信的)인 수고와 애씀을 바라지 않으셨다. 광신보다 열심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보다 점잖은 척 말씀에 무심한 자가 더욱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법이다.
모든 배후에 주님이 계신다. 이를 알면 일상이 다 주의 것임으로 허투루 둘 게 없다. 열심이 아니라 무던함이 필요하였다. 묵묵히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식사를 하며 요즘 근황을 말씀드렸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이는 터라 주일학교를 구상하고 있고, 인근 학교가 탁구로 아이들의 체육을 장려하는 터라 우리도 책상을 탁구대로 바꾸려고 한다, 토요일마다 애들이 와서 같이 책을 읽고 독서록을 쓰고 일기를 쓴다,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말씀드려서일까? 아버지는 사례비로 드린 10만원을 ‘탁구대헌금’으로 도로 주고 주셨다.
하려는 일과 되어지는 일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임의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내가 무엇을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루신다. 우리에겐 강한 의뢰만이 요구된다. 믿음은 확신이 더해져서 굳건하였다. 보에 괸 물은 그 쓰임에 따라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까지 내 안에 이는 안달복달하는 마음이야 그것으로 더욱 주를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안 그러면 죽겠는데? 서럽기도 하고 막연하여서 금세 또 한숨이 절망이 기다렸다는 듯 헤집고 나오는데? 이를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오늘 잠언이 이에 응답한다.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20:28).” 곧 마음이 어질고 자애로운 것에 대하여는 우리의 인자(仁慈)가 인자(人子)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닮기 전까지는 어디 가당키나 할까? 스스로 어질고 스스로 자애로운들 그것으로 어찌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겠나? 뒤이어 진리가 붙는 까닭도 그것이겠다. 진리는 곧 예수시라. 내 마음이 그럼에도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은 저 아이들을 더욱 더 사랑하여서가 아니라 저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바 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로 알기 때문이었다. 저들로 허물과 죄악으로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일들에 대하여 어쩔 것인가?
그리하여서 인자(仁慈)는 진리(人子)로 보호를 받는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맡기신 왕위(王位)가 견고할 것이다. 주의 자녀로서 그 자리가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업적이나 공로가 아니다. 나에겐 인자함이 필요한데 그것으로 왕위를 견고케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말미암아 가능할 수 있는 거였다. 결국은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책임을 주께 돌리지 못하는 것이 내 책임이었다. 나는 어줍기 짝이 없어서 이래저래 아이들이 못 온다는 소식에 안정제를 먹어야만 하는 처량한 위인이지만 그런 나를 빤히 아시면서 나를 이곳에 두신 이는 하나님이시었다!
오늘 시편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아무리 존귀해도 장구하지 못한 인생에 대하여는 기대할 것이 없다. 그나 나나, 우리나 짐승이나 한 세월을 지나다 가는 게 고작이었다. 곧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를 알지 못하는 데야 어쩌겠나? 곧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6-8).”
내 힘으로, 우리 노력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뿌리고 가꾸고 돌보는 것까지야 어찌 해보겠으나 것도 자라야 하고 거듭 성장하여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주가 하신다. 주가 하셔야 한다. 주가 하시게 하여야 한다. 내가 책임을 질 수 없다. 내가 책임지려 하는 게 죄였다. 주께서 책임지시게 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 주께 맡기지 않은 책임은 고스란히 내 책임이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라도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라.’ 그런 걸 어찌 내가 끌어안고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리 심오한 하나님의 뜻도 말씀으로 단순하게 말씀하신다.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 32:47).” 그러므로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48)” 이로써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말씀 앞에 아멘, 할 수 있음이 복되었다. 그리하여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값지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 모든 책임을 주가 모두 감당하시는 게 축복이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16:12).” 그리하여서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내게 두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1-22).” 오늘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도 언약궤로 앞서 가시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수 3:3).” 그리하여서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 32:2).” 가장 시의적절하게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심에 대하여,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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