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전봉석 2017. 3. 21. 07:47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잠언 21:4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편 50:21

 

 

 

소리 내어 글을 읽는다는 건 오감을 열어 그 의미에 젖는 일이기도 하다. 혀끝으로 다셔 목소리로 듣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눈으로 본 듯 몸으로 전율하는 식이다. 소리가 어찌 울려 퍼지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치 진공상태인 듯 낮고 진한 저음이 실내를 활보하는 게 듣기 좋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가뜩이나 혼자 있으면서도 나의 월요일은 더하여서 가급적이면 수업도 없고 누구와의 약속도 피하면서 온전히 들어앉아 소리 내어 책을 읽었다. 종일 미세먼지로 하늘은 어둑하였고 실내는 차분하였다.

 

낮에 잠깐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을 때 아내는 어디에 그렇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래층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아서 출근한 아이엄마가 몇 번을 채근하듯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들 전화를 해도 내려가 초인종을 눌러도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심지어는 전화를 받고는 일체 말을 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한다는 거였다. 급기야 아이엄마는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서라도 아이를 불러달라나? 호의를 권리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냥 둬.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사람이란 참 못됐다. 그러는 나나, 시도 때도 없이 아쉬울 때면 당당히 요구하는 아이엄마나, 이를 다 알고도 무시하는 되바라진 아이나,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하며 황당해하는 아내나… 서로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 아이 앞에서 덩달아 ‘선생님’의 전화를 씹는데 아이라고 대수롭게 여기겠나? 그래도 전화를 받고도 딴 짓을 하는 아이 덕에 생존을 확인한 것이어서 됐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고집에 망한다. 다들 나름의 이유와 어쩔 수 없음을 무기로 삼고 자기애(自己愛)를 휘두르는 것이다.

 

오늘 잠언의 말씀이 이와 같은 우리의 증상에 대하여 한 마디로 정의하는 듯하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이를 부러워하고 저를 괜찮다고 여기면서 나름은 다들 옳다고 살아간다. 새삼, 왜 우리에게 고통이 필요한가 알겠다. 결국은 매를 맞아야 하는 것이다. 실제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자기의 잘못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실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해도 그 마음에 어떤 미움이 항상 자리하고 있어 자신을 날마다 고통 가운데 세운다. 도둑질하는 것도 실제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고 그게 능사가 아니라 저의 시간과 마음과 기대를 아무렇지 않게 훔치는 게 얼마나 잦은지 모른다. 이에 사이는 껄끄러워지고 그걸 마치 자신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다고 여길 때가 있다. 악행이야 늘 비일비재하지 않나? 혹시나, 하는 기대와 설마, 하는 방심과 이쯤이야, 하는 안일함과 괜찮아, 하는 관대함과 다 그렇지 뭐, 하는 자기합리가 모두 악행이었다.

 

더욱이 남의 일에 간섭함으로 고난이 오는 경우가 가장 터무니없기는 하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무엇 무엇을 위해서라는 당위로, 우리는 얼마나 거침없이 남을 간섭하며 사는지 모른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1-22).”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피곤한 까닭은 그처럼 간섭을 애정이라 여기는 착각 때문이다. 이에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못된 탓에 당하는 고통도 있고 공연히 몸에 밴 잘못된 행동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난도 있다. 그러면서 이를 마치 선을 행하다 당하는 것으로 여겨 억울하게 느낄 때는 가중된다. 베드로 사도는 누구보다 잘 나서던 사람이라 그와 같은 깨달음이 남달랐을 것이다. 이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5-16).” 그 고난의 질감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이어서 당하는 고난도 분명히 있다. 나는 이게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으로 나뉜다고 본다. 외부에서 오는 박해가 있고 내부에서 이는 갈등이 있다. 공연한 시기와 괜한 무시 또는 오해와 터무니없는 대우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우리의 친절이 저들에겐 권리로 여겨지고 우리의 참음이 저들에겐 보잘것없는 취급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부적인 요인인 것 같다. 아내는 때로 자기 힘에 부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머리로는 알겠고 마음으로도 느껴지는데 그에 따른 피로감이 과중한 것이다. 기껏 할 거면서도 툴툴거리는 게 다 그래서이다. 내가 말이다.

 

모든 고통은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된다. 타당한 이유도 없다.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비바람 같다.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고 우비를 입는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너무 하시는 것 같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의문이 욥기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질문들처럼 일어난다. 그때마다 우리의 고통을 주께 아뢰며 그 심각성을 고하고 도우심을 바란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보다 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우리의 마음을 돌리시려 한다.

 

문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문제인 것이다. 아이엄마는 늘 죽상이다. 어디가 아프고 돈은 벌어야 하고 어린 딸아이 하나가 혹처럼 무겁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어서 틈만 나면 또 술에 취하고 약에 의존하며 아이 앞에서 담배를 빼어 문다. 그러다 미안한 마음으로 과도하게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어 개를 사주고 TV를 바꿔주고 학원을 옮겨준다. 아이는 이제 엄마를 다룰 줄 안다. 어른들의 세계가 너무 가소로운 것이다. 같잖은 것들의 같잖은 요구에 일일이 응대할 것 없다고 여기는 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전화가 걸려오면 받고 그대로 던져둔다. 살아있다는 신호 정도로 나름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할밖에 도대체 다른 수가 없다. 아이엄마는 하나님만 싫은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중요한 것인데, 호의는 마다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거절하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으며, 아내와 나란히 자신들 이야기를 하고 자신들로 인해 누군가 한숨을 쉬고 방도를 찾다 기도를 한다는 걸, 저들은 알까? 그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그게 오늘 우리의 모습이구나!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일로 씨름하고 저들 때문에 마음 졸이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로 말씀으로 인도하고 싶어 하게 될 줄이야!

 

누구보다 내가 이러고 있다는 게 저 아이엄마가 어느 훗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헌신하게 될 것보다 더 희박했던 가능성 아니던가? 결국 오늘의 나는 누군가의 기도응답인 것이다. 모두가 끌끌, 혀를 차고 고개를 저의며 포기하고 돌아설 때 누군가는 기어이 주 앞에 나의 이름을 올려드리며 되뇌고 아뢰어 고하고 또 바라지 않았던가? 아이엄마 흉을 보고 한심하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혀를 내두르다가도 모두가 그래도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데는 다 그때문인 것이다. 나의 오늘은 누군가의 어제였고 나의 응답은 누군가의 기도였다.

 

아내와 둘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걸 확인하였다. 주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마음 주시는 대로 힘닿는 데까지 주 앞에 저들 모녀의 안타까움을 아뢰고 또 구해야 하는 거였다. 심보는 고약하고 때론 그것으로 갈등하느라 우리가 지쳐 쓰러질 판이지만, 우리 주님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으신다. 모든 고통의 우선순위는 신뢰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쉽지 않지. 쉽지 않으니까 고통이다. 문제란 그런 것이다. 쉽게 풀리면 그게 어디 문제이겠나? 하나님은 욥에게 연거푸 문제를 내셨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우리는 삐딱하니 골을 부린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4-5).”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6-10).” 소리 내어 읽는다. 내 목소리는 고요한 실내를 휘어 감으며 메아리친다. 오감이 열리고 말씀을 듣는다.

 

입을 열어 아뢴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3).” 나를 돌이켜 주 앞에 앉게 하심으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 소리가 보이고 눈으로 본 것을 혀끝으로 안다. 마음이 열리고 온 몸이 전율한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6).”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그게 모두 나에게 들려주시는 거였다. 오늘 아침, 나의 무례함을 나약하고 태만함을 주 앞에 고한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이것이 값진 사랑이었다.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이, 성가시고 귀찮은 일들이 또한 극진하신 은혜였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 곁에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의심과 회의를 아시고 이르신다. ‘나는 있느니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