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잠언 22:17-18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편 51:15
나는 거기 없다. 내가 없는 곳에 나는 없다. 나는 여기 있다. ‘보내신 곳’에 있다. 이와 같은 되뇜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리하여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행하게 해준다. 비전은 때로 막연하여서 헛된 꿈으로 위로 받고 싶은 정도의 도피를 안주를 위로를 조장한다. 이게 맞나? 싶어서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이 거듭 확신을 구하게 된다. 주님은 방심과 함께 생활에 따른 염려도 경계하셨다. 본래 방탕의 시작은 방심에서다. 대놓고 주를 거역하는 것보다 막연하여서 설마, 하는 방심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성경의 교훈은 늘 간결하다. 군더더기 없이 한결같다. 말씀에 마음을 두지 않을 때 자기 생각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자아도취란 자기만족의 병적인 증상이다. 말씀에 마음을 두고,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오늘 잠언은 왜 그래야 하는지를 거두절미하고 이르신다.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으로 아름답다.
방심하였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에 빠지는지 오늘 다윗의 시는 알려준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저를 죽게 한 다윗은 철저하게 회개하며 주께 고한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다윗이 그런 자리에까지 빠졌다. 나라는 전쟁 중이었고 저는 후방에 머물며 방심하였다. 방심의 특징은 현실에 있어 무감각하거나 지나치나 예민해지거나 둘 중 하나다. 이에 다윗은 회개하며 말씀을 구한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당장 여기저기 나갈 게 밀려서 주저하다 탁구대를 주문하였다. 아이들 책상으로도 쓸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것이었다. 생활에 대한 염려는 사는 날 동안에 없을 수는 없는 것이겠으나 주님은 이를 아름답게 승화시켜 시적으로 표현하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수채화 같은 이 말씀을 나는 사랑한다. 나아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이 엄연한 진리 앞에서 새 힘을 얻는다. 우리의 책임은 주께 책임을 맡기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일반인 신분으로 수사를 받기 위해 검찰로 향했다. 이를 중계하는 언론과 반대집회와 찬성집회를 보면서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어느 대형교회 담임 목사가 기어이 교회 사역을 세습하였고 이에 대해 모 목사는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서는 당회를 새로 구성해서 반대하는 이들이 들어있는 교육관을 처분하기로 의결했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이를 지지하고 견제하고 반대하는 세력이 충돌하면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사도행전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었다. 함께 있으나 듣긴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 22:9).” 누구는 주의 음성을 듣는데 누구는 천둥소리를 듣는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요 12:29).”
얼마 전 친구는 모처럼 문자를 하여 모 당의 대통령 후보경선에 참여하라고 종용하였다. 그 방법을 알려주어 모바일로 참여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우리는 일련의 사회사건에 대해 방관자로 있어서는 안 되지만 또한 극구 어느 한 편을 드느라 상대를 비난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언사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정치에 눈멀고 종교에 귀먹고 자기 소신에 매몰돼 마치 종교적 신념을 사회적 공헌을 정치적 기여를 주의 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떤 기치로 모였느냐, 나는 어느 쪽이냐, 하는 데 중심을 두면 안 된다.
말씀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그 뜻을 어디에 두고 계시는지, 이를 경외함으로 묵상하고 묵상함으로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소신을 운운하는 따위에 내몰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한 번도 네 소신이 무엇이냐? 묻지 않는다. 우리를 아직 이 땅에 두시는 데는 우리들로 하여금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라는 게 아니다. 혼자 들어앉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고 나의 감상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려니까 멋쩍기는 하지만, 이제는 다만 나의 사소한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라.’ 곧 나의 주관과 판단이 성경을 앞서서는 안 된다. 말씀이 주시는 데 따른 세미한 음성은 구호를 외치며 함성을 질러 상대를 제압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탁구대를 놓을 자리를 위해 공간을 정리하다말고 뒷자리에 앉아 주를 생각하였다. 오후께 아이가 와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이와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걸으며 누구를 무엇을 주께 아뢰며, 돌아와 아래층 아이엄마에게 다녀온 아내의 설명을 듣다 마음 졸이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저들을 위해 한 마디 기도하는….
사소한 일일 것이나, 나는 여기에 있다. 별 수 없이 또 속을 끓이고, 생활의 염려로 씨름하고, 별것도 아닌 일로 공연히 애태우면서, 그리하여서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비록 이게 맞나? 싶어서 또한 쩔쩔매곤 하지만 나를 여기에 두신 이는 반드시 아실 것이란 확신이 있다. 나는 저를 신뢰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저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이시다. 그 앞에서 나의 소신도 확신도 개념도 이유도 모두 사소한 일일 것임을 나는 이제 잘 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을 신뢰하지 않기 위해 또한 경계한다. 내가 아는 게 아니라 나를 아시는 게 중요하여서이다.
너무 소소한 일상에서 나야말로 별 볼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기 있다. 거기에 없는 나를 두고 애태울 거 없다. 애태우는 나도 여기에 있다. 내가 왜 이런 일로 씨름해야 하나 때론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주님은 바로 아신다는 데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엄마는 술에 취해 아내에게 전화를 하였다. 한 달에 수고하여 번 돈 130만원을 두고 이게 어찌 맞나? 계산이 안 된다고 말이다. 시급이 얼마인지, 한 달에 무엇이 얼마씩 나가야 하는지, 아내는 묻고 또 계산하다 포기하고 올라왔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그러든가 말든가 TV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학교는 다 끝나서야 잠깐 갔다 왔고, 종일 들어앉아 개와 TV와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둘러앉아 막막하였다. 경찰에 신고라도 할까? 어디 복지재단 같은 데 없나? 아이를 아빠한테 보내면 안 되나? 이어지는 우리의 말들은 공허하였다. 딸애는 아이를 위해 기도하였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단적인 예로 본의 아니게 자주 아래층 사람들을 거론하게 된다.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의 면면이 다르지 않다. 특정지역의 일이 아니다. 저들만 그런 게 아니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사명이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저가 그리 행할지 어떨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구처럼 다각도로 모색하여 지역사회와 연계하고 교계에 도움을 청해 뭔가 가시적인 일을 벌어야 하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다가도, 우리는 세상을 정화시키라고 보내심을 받은 게 아니다. 저기,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 저들은 저들 일을 하면 될 것이고, 우린 다만 여기에 있다.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19).”
다른 이유 없다. 하나님이 손이 모자라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게 아니었다.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21).” 없는 살림에, 당장 내 코가 석 자인데, 돈도 안 되는 일에, 탁구대를 들여놓겠다는 발상이 벌써 이상하고 요상하다. 일주일 찬거리도 변변찮은데 교회 냉장고엔 초코파이와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이 가득하다. 대체 뭘 하자는 것일까? 그렇다고 애들이 교회에 오는 것도 아니잖아! 아내의 볼멘소리가 내 마음이다.
이 무모하고 철딱서니 없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까닭이 있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29).” 나는 오늘 말씀이 그리 읽힌다. 내 일에 능숙하다는 것은 두신 여기에서 늘 똑같은 일에 반복되어 충성하는 것이다. 여기가 아니면 저기로 두실 텐데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내 수고와 애씀이 아니라 주의 긍휼을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거였다. 주의 인자하심은 개념이 아니라 현상이다. 막연한 바람이 아니라 실제다.
거기에 없는 나는 내가 아니다. 우리를 오늘, 여기에 두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목적이 있다. 내 사정과 형편이 이를 제지할 수 없다. 첨예한 사회현상과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 구호와 함성과 빈정거림과 야유와 비난과 조소와 멸시와 저주가 판을 친다. 그래서 불만의 어둠 속에 있거나 조용하게 떨어져서 고상한 은둔자로 살아가기도 한다. 불평은 허상을 바라는 데서 오는 호기로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게 만든다.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일상에 충실한 것이다.
보잘것없는 일이나 것 또한 하나님이 내게 두시는 여기다. 우리는 여기에서 들림을 받는다. 거기, 저기에는 내가 없다. 행여 묵상과 책읽기로 고상을 떨며 뜬구름 잡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망상과 허상은 일상보다 쉽다. 수월하여서 그게 더 고상해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서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오늘 잠언은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실제의 삶에,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 두신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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