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잠언 23:19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편 52:8
아이들을 대할 때면 우리가 ‘진노의 자녀’였다는 의미를 알겠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중고등학생만 돼도 벌써 어른들과 같이 자신을 감출 줄 알기 때문에 진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한데 초등학생들은 아무래도 그 감정이 정직하여서 숨기기에 서툴다.
두세 명만 모이면 그 가운데 한 아이는 주장이 강하다. 상대적으로 느린 아이는 쭈뼛거리는 만큼 억울한 게 많다. 눈치를 자주 살피느라 피곤하다. 이를 주일학교라 명명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을 대하면서 그런 마음이기로 하였다. 가령 어제는 음료수와 초코파이를 주면서, 앞으로 먹기 전에 기도를 하자고 하였다. 아이들이란 어찌 됐든 순진하여서 기꺼이 아멘, 하였다. 다음 시간부터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도 기도를 할 생각이다.
전에 같으면 나는 아이들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겠다. 윽박지르고 야단치고 맘에 안 들면 내몰고 해서라도 내가 옳다는 것을 관철시키려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내게 여러 개의 괄호로 묶은 일부를 주셨다. 괄호는 문장 안에서 문법적으로도 구속을 받지 않는다. 읽지 않고 넘어가도 무방하다. 그러나 괄호는 전체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읽어내는 데 필수적이다. 실제 작가의 의도를 숨기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괄호’가 나의 일상에는 여러 개가 되는데 가령 불안증이다.
나의 신경쇠약은 예민하여서 늘 긴장사태다. 아이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내밀면 질겁한다. 연필꽂이에 꽂힌 뾰족한 연필이 거슬려 나무쟁반을 두고 연필들을 눕혔다. 물을 마시다 사래가 들려도, 서로 언성을 높이며 마주치려 해도, 혼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할 때도 나는 도무지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나에게 두시는 이와 같은 괄호 묶음이 피곤하지만 신중하게도 한다.
이런 내가 오늘 말씀을 받을 때,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라는 말씀에서 그 의미가 새삼스러운 것이다. 곧 아이들을 볼 때 우리를 주장하는 죄의 질감이 느껴진다. 이를 교묘히 감추는 데 서툰 아이들의 순진함에서 배운다. 기껏 자기가 떠들고 억지를 부리다가 옆에 있는 애를 쥐 잡듯이 하는 애가 있다. 여자아이가 당돌해서 항상 보면 대장노릇이다. 아이들은 선생 말보다 그 아이 말을 더 잘 듣는다. 심지어 한 학년 위인 사내아이도 그 계집아이 앞에서는 꼼짝도 못한다. 걔가 뭘 새로 시작하면 우르르 다른 아이들도 따라한다. 야무져서 그 애만 잘 다독이면 전체가 수월하다.
한 아인 너무 안 됐다. 늘 그렇게 눈치를 본다. 그러다 보니 꼭 다 지난 후에 우스갯소릴 해서 서로에게 핀잔을 듣는다. 그런데 그 아일 저 여자아이가 자주 두둔하고 나선다. 선생이 뭐라 하면 대신 설명하면서 그 아이 편을 드는 것이다. 그 가운데 늘 중간에 머무는 아이도 있다. 중립인 듯한데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상대적으로 저 드센 아이와 맞서고 싶은 것이다. 그게 여의치 않으니까 누가 뭐라 뭐래지도 않는데 자주 토라진다. 저 아이들의 세계가 곧 우리의 미숙한 영혼의 모습이지 싶었다.
이에 들어야 한다. 듣는다는 건 어떤 소리를 듣는 것처럼 빛깔도 모양도 그 향취도 내 안에 스며드는 것을 의미한다. 곧 ‘듣고 지혜를 얻는다’는 행위는 기울여 마음을 둬야 하는 일이 된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경우보다 부러 그리 몸을 틀어야 하고 마음을 둬야 하는 일이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나는 미숙하여 고집스럽고 억지에 따르는 우리 영혼의 골탕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애도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근데 그렇게 된다. 자꾸 그게 먼저 튀어나온다. 짜증이 화가 퉁명스러움이 억지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말씀을, 이를 듣고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 하고 읽는다(잠 23:19). 이것으로 새로 내게 두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괄호를 읽는다. 거기에서 내가 보이는 것이다. 우리 죄의 어쩔 수 없음이 느껴진다. 전해들은 아이엄마에 대한 이야기나 그 집 형편에 대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결코 무방하지 않다. 바로 이런 느낌이 ‘듣다’이다. 물이 스미듯 빛이 드는 것처럼 나는 아이들에게서 주의 음성을 듣는다.
바울은 그리하여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하며 우리의 성장을 독려하였다. 한데 우리 안에 고집이 또 얼마나 센지 모른다. 이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 37:8).” 성경은 이른다. 어린 게 무슨 분이 있겠나 싶지만 나면서부터 우린 분하다. 일찍이 에덴에서 쫓겨나 다신 되돌아갈 수 없을 때부터 그러했다.
나름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가인의 분은 동생을 살인하는 데 이르렀다. 그래서 노를 발하는 일은 거의 무의식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이는 불평에서 자초한다. 미세한 불만, 무시당한 것 같은 불쾌함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서 몸을 병들게 한다. 한 마디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불평이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처럼 지혜란 듣게 하는 것이고 이로써 자기의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의미를 감추기도 하는 게 ‘하나님의 괄호’다. 각자에게 두시는 ‘어쩔 수 없음’으로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른다. 모나고 삐뚤어서, 마치 주머니 속 송곳처럼 자신의 감정에 찔릴 뿐인데도 이를 꺼내놓을 수가 없다. 그러자면 또 화가 분이 불평과 섞여 올라오는 것이다. 슬그머니 안으로 감기든가 빗대듯 밖으로 뻗치든가 서로를 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탁구대를 들여놓고 나는 더욱 불안하였다. 혹시 모서리에 아이들이 찧을까봐, 저러다 싸움이 날까봐, 드센 아이는 점점 고집을 부리고 시무룩한 아이는 여전히 주변을 맴돌고, 이렇게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아서야 어디…!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녹초가 되었다. 별 수 없이 연거푸 주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였다. 소파에 누워 책을 펼쳤을 때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게 또한 놀랍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그렇구나. 아이들의 면면을 통해 하나님은 먼저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 거였다. 저 아이의 고집이 내 것과 다르지 않았고, 우울하게 안으로 감겨 눈치만 보는 아이의 억울한 영혼이 또한 내 속에도 여전하였구나. 함부로 구는 행동이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말투나 그러면서도 이를 능숙하게 감추지는 못해 얼굴에 몸짓에 고스란히 배어날 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럴 수 있는 게 ‘듣고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이었다.
말 좀 그만해. 짜증 좀 내지마. 할 거 하고! 내가 아이를 제지하자 아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성격 좋은 아이의 정직함에 내 마음이 다 유쾌하였다. 맞다, 우리는 그게 안 되는 것이다. 누가 모르나?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또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주님은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방탕하게 하고 술 취함으로 내몰면서 생활의 염려와 뒤섞어 우리 마음을 둔하여지게 하는 것이다.
두려운 건,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러지 말 걸, 하고 돌이키려 해도 더는 어쩔 수 없는 아찔함에 대하여…. 가인은 후회하며 자기 벌이 너무 중한 것을 알았을 때는 늦었다. 농담으로나 흘겨 듣고 성에 남았던 롯의 사위들은 무너져 내리는 성중에서 울부짖었을 것이나 늦었다. 뜻밖에 덫과 같은 것이다. 걸렸다, 싶으면 이미 늦은 뒤여서 말이다.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지혜였다. 은총이었다.
그러나 우린 다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아, 이와 같은 말씀이 약속이 있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모른다. 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다. 그 뿌리가 물가에 심겨진 나무인 것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1:3).” 곧 ‘하나님의 괄호’가 있다는 건 특별하다는 것이다. 확실한 보증이 된다.
괄호에 묶인 덧붙임은 그것으로 문장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곧 ‘따로 구분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는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그러므로 어떤 것으로도 빼앗기지 말라. 하나님 아는 것 외에 다른 일로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6).”
나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를, 결국 나의 복종이 온전하여지기를 주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거였다. 고로 아이들을 사랑하되 아이에게 끌려 다닐 거 없고 한 영혼을 귀히 여기되 저에게 굽실거릴 일도 아니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건, 저를 용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때문이다. 하나님이 저를 거기에 두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도엑이 누군가? 아히멜렉의 성소에 다윗이 숨었다는 걸 사울 왕에게 발고하여 무고한 선지 생도 70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람이 아닌가?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시 51:7).” 여전하여서 내 안에 우리 가운데 이 땅에 도엑이 또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른다.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1).”
아이들에게서 도엑을 본다. 그 부모와 환경과 여러 여건과 상황 속에서 자라난다. 내 안에 여럿의 도엑이 눈을 흐리고 마음을 어지럽힌다. 스스로 든든하게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게 한다.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 것이다. 적당하다 여겨 어떤 말씀도 농담으로나 듣는다. 그럴 수 없게 하나님은 나의 하루 가운데, 문장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괄호를 두셨다. 불안하고 초조하여, 몸은 아프고 신경은 쓰여, 그래서 아이들을 살피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주목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잠 23:19).” 오늘 말씀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들린다.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아이처럼 말한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러자 저 끔찍한 도엑을 앞에 두고도 염려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괄호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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