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생을 굽어살피사

전봉석 2017. 3. 24. 07:45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잠언 24:9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제 거 드릴까요? 아이가 두 개 있는 탁구공 가운데 하나를 내게 주었다.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보는 아이의 적극적인(?) 의사표시여서 놀랐다. 아이는 서둘러 다음 주 국어시간에 있을 피피티작업을 마치고 눈치를 살폈다. 탁구 실력이 제법 좋았다. 뒤뚱거리면서도 곧잘 받아 넘기는 내가 신기했던가보다. 하긴 아이들에겐 그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모양이었다. 것도 운동이라고 금세 숨이 차고 땀이 났다. 앞서 성경공부를 마치고 당구를 치고 온 뒤라 몸이 무거웠다. 일요일에 와. 나는 지나가는 말처럼 아이를 초청했다.

 

‘청함과 거절 사이에서’ 나의 지나가는 말이 아이의 심령에까지 도달하기를 기도하였다. 뭐랄까?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올 때면 슬퍼진다. 우리의 친절이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처럼 여겨질까 봐서 말이다. 저녁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은 층에서 생활하는 아이를 만났다. 그간 복도에서 얼굴을 익힌 아이였다. 왜 상가건물 한복판에서 일가족이 생활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한 번 와봐. 던지듯 말을 건네고 헤어졌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들은 이제 내가 누군지를 안다. 은연중에 건네는 나의 청함에 대하여 저들의 ‘응함과 거절 사이에서’ 내가 주저할 일은 없었다. ‘나와야 할 영혼을 주께서 부르시고’ 하는 게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올 줄 알았던 이가 오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 오겠나? 싶었던 사람이 오는 것에 대해서도 놀라울 게 없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다만 그러는 동안에 나의 자세를 염려하는 것뿐이다. 꾸며서 무얼 의도적으로 도모하려는 것이 돌아서서 무심히 외면하려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누가 봐도 목사면 된다. 그냥 그런 사람으로 여겨지면 될 일이다. 교회도 많고 거반 교인이라고들 하는데 무슨 선한 말을 보태서 될 일이 아니다. 그래봐야,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제 기독교의 청함은 전도공학적인 어떤 의도 때문이어서는 어림없다. 한 집 건너 교회고 두 사람 건너 교인이다. 빛이 빛이다 하고 소금이 소금이다 하는 경우는 없다. 그냥 빛이면 되고 소금이면 맛을 내면 될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너나 잘해!’ 하는 말을 무슨 트라우마처럼 안고 있다. 근데 이를 가만히 묵상하다보면 이보다 진리도 없는 것 같다. 뭐라 하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나에게 의롭다 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어떤 충성보다 값지다. 나 같은 게 무슨, 하는 자세는 겸손이 아니다. 교만을 포장하는 회피다. 나 같은 걸 의롭다 하시는 이가 계신데 말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내가 의로운 척 하는 게 문제지 나를 의롭다 하시는 데야!

 

그러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 요즘 나는 새삼스러운 훈련 중인 것 같다. 그러니까 아이를 사랑하되 아이를 보는 게 아니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되 그 영혼으로 연연해할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좀 해볼까 하는 건 사기꾼의 마음이거나 위선자의 태도일 거였다. 누가 정죄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는데 말이다.

 

이를 누가 끊을 수 있겠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내가 의를 행하여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의 ‘이상한 기준’ 앞에서 내가 어리둥절할 것도 없다. 하나님이시니까 말이다. 소리 내어 로마서를 읽다 그 이유가 선명해졌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6).” 거두절미하고 나는 그리스도의 것인 것이다.

 

이를 앎으로 모두에게 빚진 자가 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 그러므로 나의 수고와 애씀이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수고도 무슨 애씀도 아닌 거였다. 그냥 되어지는, 찬송이 되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그러니 말 그대로 ‘너나 잘해’ 하는 이 말보다 강한 메시지는 없었다. 감 놔라 배 놔라 할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알지 못할 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주를 바란다.

 

뭐라 하죠? 어떻게 할까요? 그래놓고 나는 그만 잊는 것이다. 얘를 어쩌나 싶었는데 벌써 일 년이 다 돼 가고, 아이가 먼저 ‘제 거 드릴까요?’ 하는 반응으로 한 걸음 다가올 때의 전율이라니! 항상 보면 나의 미련함은 죄 된 생각뿐이었다. 판단하고 간섭하고 뭐라 훈계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저를 미워하는 자리에까지 드는 것이다. 그게 다 ‘너 때문이야!’ 하고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거만한 자였다. 오늘 잠언은 이를 지적하신다.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잠 24:9).”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게 거만함이었다. 내가 언제? 하고 우기면 미련하다. 성경은 이를 확실히 하신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그러므로 나는 요즘 누구를 겨누어 설왕설래하지 않는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 환호하고 그 앞에서 춤을 추는 자는 화 있을진저.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18).”

 

힘겨워 하는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게 아니라 그걸 알아주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내가 그럴 때 무얼 바랐나?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 돌아보니까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나의 아픔과 상처까지도 선하심이었다. 이를 아는 것은 나의 깨달음이 아니다. 경험이 스승이 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5).”

 

그리하여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나를 참으신 이가 나를 의롭다고 하시니 이보다 더 큰 수확이 있을까?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뿐이시다. 아침에 아이들이 오기 전에 말씀을 읽으면서 메모하였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나의 주는 미쁘심으로,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오늘 나에게 평화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게 나를 내어드려야 한다. 내가 책임지려 할 거 없다. 그게 거만함이었다. 묵묵히 구별된 시간을 내어드려 주께 집중하는 것,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가시적인 아무런 성과도 없는데 내 안에 두시는 평안에 대하여 때론 난감하다. 돈이 씨가 마르고 몸은 무겁고 일상은 늘 그 타령인 것 같은데, 그때마다 늘 그렇듯 아이들을 대하고 할 수 있는 성심으로 주를 생각하는 일, 성도의 일이란 어떠하든 주를 앙망하는 거였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 34:5).”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나는 다만 주께 집중하는 것. 주를 바라며 주를 기억하는 일. 그리하여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으로 주가 선하다고 하시니까 나 또한 나에게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주가 나를 도우시니 누가 정죄할까!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9).”

 

주만 보고, 주께만 집중하면서, 이렇게 주의 제단에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사 43:4).”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