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26 주일
잠언 9:1-10
지혜의 집
9:1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9: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9:3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9:4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9: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9: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9:7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9: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들어가는 말
좋은 게 있을 때 우린 서로에게 권한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찬송이란 그런 것이어서 좋은 걸 숨기지 못하는 법이고, 그 좋은 것을 저절로 권하게 되는 것이 전도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참 좋은데 그 하나님을 나만 좋아라, 하는 것은 이상하다. 본디 좋다는 건 입 꼬리가 올라가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피식, 웃음이 번지는 기쁨으로써 가히 숨길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이란 그런 것이어서 교회는 이를 아는 자들이 모여 함께 그 좋음을 나누고 좋은 것으로 서로 권하며 더욱 풍성함으로 나아가 권하는 것이다.
지혜는 집을 짓고 우리를 청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다. 일곱 기둥을 다듬어 완전한 건축을 이루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주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별 일 없을 때에야 누가 아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고 빠르기까지 하다. 그래서 아직도 주추를 세우고 터를 다지는 이를 저들은 조롱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게 돼 있다. 주님은 우리가 방심하는 것과 생활로 염려하는 것을 둘 다 경계하셨다. 롯의 처를 기억함으로 방심하지 말라는 것,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먹고 사는 일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우리가 구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것,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결국 간단한 지혜의 이치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20).”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혜의 집에 들어가는 데 있어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1. 귀히 여기는 것을 하늘에 쌓자.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1-2).” 평생 돈을 모으고 집을 사고 일터를 구하느라 생을 허비하는 세상에서 그 부질없음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첫 마디를 꺼낸다. 우리 주께서 집을 지으시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곧 우리의 지혜 되시는 이가 우리가 거처할 집을 지으신다. 일곱 기둥을 다듬어 영원한 집을 건축하신다. 이에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하면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집은 한시적이다. 우리의 몸도 다르지 않다. 이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2. 구원의 자리로 초청하자.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2-6).” 성경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말씀은 우리가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신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간다는 건 ‘지혜의 여종’이 되어 주인의 잔치에 초청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글방에 아이들을 모으고 함께 교회를 이루어간다는 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런데 다들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우선하는 순위가 있어 이를 거절한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9-20).” 그러니 어쩔 것인가?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1).”
3. 쓸데없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자.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6).” 주를 온전히 따르려고 하면 뭐가 그리 걸리적거리는 게 많은지 모르겠다. 염려와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때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 책임을 맡기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지 않는 데야 별 수 없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기독도’의 걸음처럼 짊어지고 싸안고 끙끙거리며 가는 동안은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의 무게로 그 길이 고역이기만 하다. 어쩌겠나? 그러느라 쉬 지치고 넘어져서 지체되고 낙심하는 것이야 자기 몫일 테고, 청함을 받고 거절하는 데야 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기껏 생명 길을 가면서도 싸안고 떠이고 가야겠다면야 할 수 없는 노릇이겠거니.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 5:27-28).”
4. 허튼 데 마음 두지 말자.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8).” 공연한 일로 논쟁을 일삼고 결국 미치지도 못할 일에 헛힘을 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것도 지적유희를 즐기느라 성경을 탐구하고 갑론을박 제 취향에 맞는 구절로 희희낙락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 왜 저런 문제로 씨름하나? 싶게 군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제도적 교리적 모순과 싸워야 했던 중세의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저들이 흘린 땀과 수고에 의해 교리가 정립되었고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으며, 우린 그 수혜자로 살아가고 있다.
한데 초대교회 시절로 돌아가자는 둥 사도시대를 운운하며 부러 고생을 체험하는 삶의 현장을 연출하려 드니 이 또한 배부른 짓이다. 특별한 체험은 일상의 하나이지 전부가 될 수 없다. 시시하고 밋밋한 것 같으나 오늘 그와 같은 일상에 충실한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다시 초대교회 시절의 처절함과 사도시대 때의 핍절된 상황을 더하실 것이다. 그러니 체험현장을 견학하듯 주신 삶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뭐라 한들 들으려하지 않는 이를 어찌할 거 없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주신 바 우린 우리의 시대를 삶으로 족한 것이다.
5. 지혜의 원리는 겸손과 순종이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7-8).” 묵묵히 주신 날을 사는 게 사명이다. 비전을 운운하느라 헛된 꿈을 꾸고, 망상에 도취되어서 신앙을 힐링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남들이 뭐라 해도 무던히 주만 바라고 가는 게 성도다. 다들 먹고 사느라 여념이 없어 사느라 죽을 판이지만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고로 우리의 양식은 주님이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6-57).” 말씀으로 오신 이가 우리의 양식이시다.
그러므로 지혜의 원리는 겸손히 순종하는 삶이다. 주신 날을 말씀으로 채우는 일이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8).” 이것이 곧 오늘 잠언의 원리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6).”
나오는 말
주를 아는 것이 지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10).”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거룩하여지는 길이다. 앎으로 닮고 닮음으로 다가간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시 22:4).” 곧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그러므로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잠 9:11).” 우리의 날은 영원하다. 한데 거만하면 해를 당할 것이다. 이는 주께서 부당하신 게 아니라 그리 선택한 이의 몫이다. 그러므로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13-17).” 유행어처럼 모두가 바라고 즐기는 게 되었다. 이에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8).”
자 이제, ‘지혜의 여인’이 청하는 소리에 응할 것인가 ‘미련한 여인’이 떠드는 소리에 답할 것인가? 오늘 본문은 조용히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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