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2 주일
잠언 10:1-12
지혜의 소리
이어지는 15장까지의 내용은 ‘지혜의 반의적대구법’으로 쓰인 잠언이다. 즉 서로 반대 되는 의미를 비슷한 어조로 짝을 지어 표현하는 방식으로 ‘의인과 악인(10-1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13-15)’의 엇갈리는 운명을 순발력 있는 경구로 담고 있다. 흔히 잠언을 금언 또는 격언이라 하는 까닭은 그 오랜 역사적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오늘 우리의 인생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지난주일, 앞 장에서 우리는 <지혜의 집>을 살펴보았다. 지혜는 집을 짓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요 곧 우리가 들어갈 천국을 예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①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자는 것. ②그 곳으로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을 초청하자는 것. ③이를 위해서도 쓸데없는 데 연연해하지 말자는 것. ④그리하여 허튼 데 마음을 두지 말고, ⑤겸손과 순종함으로 지혜의 원리를 따르자는 것. 곧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을 나누었다.
오늘은 그 지혜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이해를 더하려고 반어적인 대구를 이루며 속히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에 그 지혜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 지혜의 소리를 흘겨듣지 말자.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1)
자고로 말을 안 듣는다는 건 자기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특징은 자기 고집을 꺾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 그 부모의 역할은 그릇된 고집을 꺾고 바른 습관을 들이게 하는 일이다. 이는 가히 전쟁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새롭다. 나면서부터 우린 죄악에 물든 상태다. 그 이기적인 태도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자기중심적이다. 울고 떼쓰고 억지 부리는 아이를 바르게 교육하지 못하면 나중에 그 값이 혹독하다. 그러므로 잠언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22:6).” 단언하였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은 그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언약이기도 하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그러므로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 곧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2. 소유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2).”
오히려 여러 현자(賢者)는 청빈을 강조하였고, 궁핍이 주는 자유함에 대하여 역설하였다. 소유가 많음으로 얻는 이익보다 적음으로 이루는 덕이 크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많음이 모자람만 못하다. 당장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데 저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성경은 이를 엄중히 경고한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그래서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10:2).”
이에 공의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진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욥 11:14-15).” 곧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우리의 수고는 이 땅의 부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3. 부유와 가난은 선악의 여부에 달려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3).”
우리가 기를 쓰고 취하여 얻는 보상으로써의 부유함이 성공된 삶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책임지신다. 우리의 책임은 그 책임을 주께 맡기지 않는 것이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들꽃이 자유로운 것은 제 몸을 위해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로운 것은 그 길을 따라 날고 드는 일에 억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이를 입증하지 않는 삶이 성도다. 이를 성경은 단언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4. 현숙함으로 남에게 본이 되자.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4).”
현숙함이란 어질고 정숙한 여인의 마음이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31:10).” 그러므로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0).”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 신자들의 자세이기도 하다. 이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곧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지혜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 9:11).” 여기서 모두라 함은 나는 어떠한가를 묻는다. 곧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 3:10).” 성실하고 정직한 삶으로 표가난다.
5. 게으름을 버리자.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5).”
그러므로 게으른 데는 방도가 없다. 낙심하여서든 실의에 빠져서이든 억울하여서든 불우한 환경 때문이든, 게으름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괜찮다고 하지 않는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1-13).” 사람의 도리를 바로 아는 게 거기서 나온다. 누구의 평가에 의한 게 아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29).”
그러므로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영적인 게으름에 대하여는 두 말하면 잔소리다.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고, 할 거 다 하면서 대체 뭘 이루겠다는 소린가!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이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6. 신앙의 본이 되자.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6-7).”
무엇을 자손에게 물려줄 것인가? 집 한 칸 땅 한 조각이라도 남겨야 한다고들 하지만 오늘 지혜는 우리에게 참 삶의 본을 남기라고 하였다. 어느 학자가 자식 교육에 대해 너무 등한시한다는 아내의 지청구에 이렇게 말했다. 이 애비가 사는 모습을 보고도 배우는 게 없다면 뭘 더 가르칠 수 있겠소! 서로를 기억할 때 칭찬할 게 많은 사람으로 살자. 자식들에게 기억되기를 자랑스러운 신앙의 본을 남겨주자.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시 112:6).”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 14:9).” 누구에게 본이 된다는 건 결코 인위적인 게 아니다. 억지로는 안 된다. 하물며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우리 신앙의 본이 후대에게 기념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재산보다 값지다.
7. 정결한 자가 되자.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8-9).”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된다는 건 표 나는 옷차림과 꾸며낸 말투와 더해진 선행 때문이 아니다. 일상의 평범함에서 누군가의 빛이 되어야 한다. 어디 있든 그 맛을 내야 한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그러므로 의인은 사자 앞에서도 당당하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독일의 청교도주의자들은 그 집에 울타리를 치지 않았고 거실은 밖에서 훤히 보이는 가정에서 살았다. 모두에게 드러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중삼중 감추고 또 은폐하고 의심하고 방어한다. 최측근도 믿을 수가 없어 서로의 대화를 녹음한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8).”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긴다. 하나 우리는 다르다.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저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어쩐지!’ 하고 남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8. 말을 맛나게 하자.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10-11).”
참 쉽지 않다. 우리 입엔 필터가 없다. 거르지 않고 말이 툭, 튀어나오기 일쑤다. 그만큼 흉허물이 없다고 하는데 또한 그만큼 존경과 존중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말이 곧 경건의 척도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우리 성도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말을 고르고 표현을 다듬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8).”
9. 사랑만이 바른 길이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12).”
주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계명을 주셨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환멸에 휩싸여 저주한다. 교회가 교회를 목사가 성도를 응징하고 처단하려 든다. 한데 성경은 그러한 허물을 덮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러니 이게 어디 우리 의지로 가능한가?
나는 사랑할 수 없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 같이 나도 저를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이게 그럴만한 상대이면 가능한데 나를 능욕하고 멸시하고 천대하던 사람이라면 이게 어찌 가능할까?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한데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었다.
나오는 말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사가 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데에 우리의 용서가 어찌 어렵기만 할까? 내가 뭘! 내가 어때서? 굳이 나 때문에 죽기까지 하실 게 뭐 있어? 하는 자는 어림없다. 지혜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게 은혜다. 이를 사모하고 바라는 데서 참 사랑이 나온다. 억지로 머리로만 사랑하라는 게 아닌 것이다.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오히려 양자로 삼아 후에 저들로 주의 종이 되게 하였던 손양원 목사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런 자의 특징은 지혜에 순종한다. 인생의 소유에서 부요함을 구하지 않는다. 현숙함으로 그 삶이 정갈하다. 게으르지 않으며 후대에 본이 된다. 정결하여 그 삶이 맛이 난다. 그런 자의 가슴에는 주의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집에 들어가는 자는 지혜의 소리를 흘겨듣지 않는다. 우리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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