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슬픈데 슬프지 않은, 힘든데 힘들지 않은 날이었다. 일찍 글방으로 갔다. 오전은 뚝딱이다. 아내도 열 시가 안 돼 올라왔다.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데 새로웠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저마다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이 신념의 것이면 헛되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우린 두 구절의 말씀을 놓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믿는다는 건 막연한 허상이 아니고 자신의 소신도 아니다. 약속을 붙든 사투며 몸부림이다. 우리 안에 전쟁이 그칠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주님은 화평이 아닌 분쟁을 주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곧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신다는 건 대단한 낭패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처녀가 임신을 하는 일처럼 말이다.
왜 우리가 이 일 때문에 힘들어 하나? 쟤가 뭔데 나를 이처럼 곤혹스럽게 하나? 이를 받아들이고 기쁨을 누리기까지는 적잖은 소동이 따른다. 내 안의 싸움이 쉴 새 없는 일이다. 전에는 몰랐던,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새로워졌다. 막연한 다짐에서 구체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몰지각한 엄마들을 탓하기에 앞서 저들도 어쩔 수 없는 이 죄악 된 세상을 한탄하며 저들을 대신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애통함이란 그런 거였다.
아내와 열띤(?)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문자가 들어왔다. ‘내일 주일 날 일찍 가겠습니다.’ 새벽에 그처럼 나를 못살게 굴던 아이였다. 가슴이 먹먹하여,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토라져 더는 말도 안 섞고 그대로 떠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던가보다. 괜한 얘길 해서 그마저 아이를 놓치나 싶었나보다. 은근히 맘 졸이고 있었는데, 아이가 새벽에 보낸 쪽지를 보고 그리 답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신기하지 않나? 이게 뭐라고! 내게 무슨 득이 되는 일이라고! 얘가 뭔데 이렇게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가, 싶었다. 성령이 우리에게 거하신다는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내와 멸치국수를 점심으로 먹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영화를 보러간다고 오지 않았다. 천근만근인 몸을 뉘어 깜빡 졸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날들이 참 재미지다. 주가 주시는 끌탕은 나의 기질과 개인적인 확신에서도 자유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우리가 어찌 ‘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게 하시는 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우리를 못 살게 구시는 거다. 그와 같은 고난는 아주 별 거 아닌 것 같은데서 큰 위로를 얻는다.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 1:39-41).” 이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까? 성령으로 임신을 한 처녀와 늙어서 아이를 갖지 못하던 여인이 만나 뭐 그리 즐거울 게 있겠나?
아이의 쪽지 하나가 나를 기쁘게 한 것도 그뿐이다. 나는 이것을 어찌 설명할 수 없다. 내 새끼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저 괘씸하고 서운한 감정만 덕지덕지 붙은 줄 알았는데, 나와 상관없이 내 안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이가 있었다.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4).” 현실과 상관없는 일이다. 당장 어떠해도 이미 충분한 거였다. 아내에게 그와 같은 내용으로 ‘믿음의 약속’을 설명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이 있어 떠난 게 아니었다. 말씀을 붙든 것이다. 저는 약속만 의지하고 간 것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때 믿음이란 자기 소신이 아니다. 신념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8).” 저를 붙든 것은 약속이었다. ‘좋아 결심했어!’ 한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가 힘든 일을 겪을 때 보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든 일을 두시는 건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이를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하나님을 부르게 하신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문제 때문에 주의 도우심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 자신을 알게 하신다. 아이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던 것이 아이로 인해 주가 하시는 일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보면 늘 화근은 나의 지레짐작이다.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분주한 만큼 걱정의 문을 열어둔다. 끌탕을 짓는 동안 비로소 내 안의 찌꺼기가 타버린다. 마음을 연단하시는 주님,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이로써 인내를 배워가는 일이다. 그러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소망은 약속이다.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의지하였던 것, 그 약속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음이다. 이 조화가 무슨 일인가? 백 날 탐구하고 연구한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으로 인해 나는 싸우는 것이다. 끙끙거리면서도 신기한 건 이게 싫지가 않은 것이다.
아이로 인해 너무 힘든데, 그 힘듦을 마다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가난이나 질병이나 생의 여러 고통이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 같은데, 그게 있어서 오히려 주의 은혜가, 성령의 임재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다. 신기하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눅 21:13).” 믿음이란 오늘을 위한 게 아니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
그게 전부였다면 아브라함도 애저녁에 글렀다. 자신의 의지에 따른 거였다면 이미 엘리에셀로 충분하였고 이스마엘로 족한 거였다. 저도 자기 안에 내주하신 ‘성령의 잉태’로 말미암아 약속을 붙들 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란 외부에서 내 안에 들어오는 신비였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상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그럴 수 있는 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의 실체는 약속이니까, 약속은 말(言)이다. 말한 이의 말 값이 믿음이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해?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물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걸 절실하게 인정하면 돼. 나는 바보처럼 말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게 그럴 거였다. 애통함이란 사는 데 따른 어려움과 고통을 토로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억울함을 분해하는 것도 아니다. 애통함이란 주의 마음으로 스데반처럼 부르짖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60).” 곧 주님의 마음이다.
주님이 왜 우리에게 산상수훈을 주셨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와 같은 복을 주시려고 우리는 그와 같을 수 없음을 여실히 고백하게 하신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주밖에 없기 때문이다. 애통함은 주를 더욱 사랑함이고, 주밖에 의지할 이 없어 나는 온유하여진다. 의에 주린 것이다. 나도 알 수 없어 주의 긍휼하심을 빈다. 청결함이란 하나님이 보이는 마음이다. 그래서 어디 있든 화평을 더한다. 주를 위해 고통당함을 마다할 수 없다.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복에 대하여 경이롭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그럴 수 있는 건 순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대해 힘쓰지 않는 것, 주가 하시게 힘을 빼는 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 그리하여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하여 오늘 잠언은 일갈한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6:12).” 행여 내 안에서 나의 믿음을 확신하던 오만함을 회개하게 하신다. 내가 믿는 게 아니라 믿게 하시는 이의 약속을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말씀은 나의 자세를 바로 고치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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