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23, 19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시편 56:10-11
기도는 응답을 전제로 한다. 모든 기도는 응답한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10).” 기도의 제 일 원칙이다. 당장 드러나지 않을 때, 원하던 게 아닐 때 혹은 다른 형태의 것일 때 우린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8).” 모든 기도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데 목적을 둔다. 그러므로 나의 요구와 관심이 기도의 초점이 아닌 것이다.
나는 기껏 기도해놓고도 설마, 하는 경향이 있었는가? 아이가 왔을 때 울컥, 하고 믿기지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태우는 걸 귀히 받으신다. 간절함에는 주를 향한 마음이 정도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때론 내 요구뿐이라 해도 이를 바라고 구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실진대 결단코 허투루 들으시지 않는다. 뒤미처 우리 사장 둘째 아이도 와서 놀랐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누었다. 그럴 때면 함께 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다 마음이 짠해진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우리에게 두신 일이었다. 나는 매주일 기도 응답을 실제로 확인한다. 기도한대로 이루어질 때는 물론 전혀 엉뚱한 데서 응답이 오는 데도 놀랍다. 그럴 땐 실의에 빠져 마음은 저 혼자 고꾸라지곤 하지만 별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는 마냥 끌려갈 수는 없다. 그리 내버려두지도 않으신다. 낙심 가운데서 주의 음성이 더욱 선명한 걸 보면 말이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더러는 그 마음을 모르겠다고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 마음이다. 한껏 감춰보지만 금세 들통이 난다. 늙어서 그런가? 아이를 보자 울컥, 목소리부터 떨렸다. 이게 뭐라고! 얘가 뭐라고! 나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으시려나? 짐작하게 한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이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고,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그와 같은 마음을 허락하시는 게 놀라운 축복이다. 아이 때문에 속 끓이던 걸 생각하면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는 데 놀라운 것이다. 어느 기독교 동아리에 들었고 저들과 합숙을 하며 날마다 기도하기에 힘쓴다는 말에 것도 신기하였다. 거기가 이상한 데 아닌가? 소속이 어딘가? 걱정해야 하는 게 민망하였다. 저들도 우리 교회에 대해 그리 물었다고 해서 말이다.
엘리베이터까지 아이를 배웅하면서 주일을 잘 지킬 것과 그런(?) 일은 그만둘 것과 언제부터 성경공부를 다시 하자는 것을 운운하느라 잔소리꾼이 된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아이의 대답은 그래볼게요, 하는 것이어서 서운했다. 사내 녀석들이라 그렇긴 하지만 좀 서로에게 말도 걸고 응원도 하고 뭐 그렇게 살가웠으면 좋겠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은 것이다. 여자아이가 한둘 같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하고 바라다 머쓱해졌다. 모르겠다. 하나님이 하신다.
나는 다만 단순하고 순진하게,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주를 바라게 하신다. 애가 온 것도 올 것도 함께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도 주가 하신다. 잠깐이지만 탁구도 치고 비보이도 추고 서로 간간히 묻기도 하고, 양떼의 형편과 소떼를 살펴 관심을 두는 일이었다. 왜 이래야 하나? 어린아이처럼 그냥 그리하게 하심으로 그리하는 것이 복이었다. 재고 따지고 자기 생각을 운운하다보면 자기 의가 드러나고 소신이 말씀을 앞서게 돼 있다.
기대가 앞서지 않게 그렇다고 실망하는 마음이 뒤따르지 않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나의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신다. 아이를 사랑하되 아이를 의지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저 한 영혼을 귀히 여기되 사랑이 수고가 봉사와 헌신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모두는 그의 말씀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다. 주를 의지함으로 주의 말씀을 찬송하는 것뿐이다.
곧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사람을 보고 가는 길이 절대 아니었다. 교회에 실망하고 떠난 사람은 모두 사람을 어찌하였기 때문이다. 의지했든 바랐든 좇았든, 바람은 바람에게 붙들리면 소멸되는 것과 같다. 나는 늘 이 문제에서 헤맨다. 사람에게 기대하면 영락없이 무너뜨리시는데도 말이다. 그럴 때 보면 나는 꼭 짐승 같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시 73:22).” 왜냐하면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건 우매 무지함이다.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그게 그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5).” 내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말씀과 기도에 충실한 것이겠다. 우매 무지함이란 죄의 속성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3).” 내가 쥔 게 아니라 주께서 나를 붙들고 계신 것이다.
어떠하다 해도 나의 노력이 또는 수고가 애씀이 하나님의 역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 슬기다. 그래서 의연함이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저 혼자 휘몰아치는 바람 같아서 종잡을 수 없는 일 같으나 마음은 항상 의지를 따른다. 몸을 훈련하는 것이 자세와 마음을 건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연히 나는 또 좌절하고 실망하겠지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바동거리는 게 문제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생각을 고쳐주시지는 않는다. 어디에 마음을 두느냐 하는 것은 엄밀하게 몸의 일이다. 몸을 여기에 두고 마음은 저 일을 바란다는 건 어리석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책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은 책을 들고 시선을 두는 몸을 따르는 것이지 마음이 있다고 책을 들고 시선을 두는 것은 아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인 게 가장 큰 문제다.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약하여서,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나를 여기 두시는 건 아직 여기 있을 마음이 아니어서 그리하신다. 모세를 광야에 40년 동안 거기 두신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간다는 건 마음의 일이 아니라 몸의 일이다. 거듭났다고 해서 그 자세까지 하나님이 교정해주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더 삐걱거리고 탈이 나고 부대끼고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건 당연하였다. 그래서 다들 멀찍이 서서 건성으로 시늉만 내는 걸 선호한다. 그 정도의 위로로 족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이가 이렇게 저렇게 해주어서 네, 하고 순종하였으면 참 좋겠는데! 나는 아이를 보내고 급 우울해지기도 하였다. 생각해볼게요, 그래 볼게요, 봐서요, 하는 말들 때문에 말이다. 그래, 주의 말씀이 나의 성품이 될 때까지! 한 번 두 번 더하다보면 그게 습관이 되고 습관은 곧 성품이 되어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것이다. 유익한 습관은 그게 우리 몸에 배기까지는 엄청난 저항을 받게 돼 있다. 그래서 기도할 시간을 만들어야 하고 일부러 혼자 있는 시간을 두어 말씀을 읽어야 하며 외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입을 좀 다물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두게 하시는 이가 몸을 이끌 힘도 주신다. 그러는 동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나를 저의 곁에 두시고 저가 나와 함께 하게 하시는 이유였다. 그러는 우리가 교회다. 주의 몸을 이룬다. 이때 나의 기도가 동떨어지지 않기를. 뭔가 남다른 무엇을 추구하지 않기를. 행여 사람에게 보이려는 게 아니기를.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그러므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가끔은 이와 같이 묵상글을 쓰는 게 혹여 그러하지 않을까, 조심하는 이유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혹은 나의 만족을 위한 게 될까 봐. 그리하여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꾸미고 덧대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붓 가는 대로’ 마음을 이끄시는 대로 묵상글을 쓰고 말씀을 찾고 중심을 기울인다.
나의 기도는 단순하여서 같은 말을 되뇌고, 나의 글은 그것과 다르지 않아 썼던 내용을 반복하고, 나의 책은 관심은 재미는 그리고 감사에까지 ‘습관에 따라’ 주를 바라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그와 같은 바람은 몸을 저지하고 마음을 기울여 성품이 되기까지 연거푸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9).” 곧 하나님은 나로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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