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전봉석 2017. 3. 25. 04:49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잠언 25:12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4

 

 

 

속상해서 그런가, 일찍 눈을 뜨곤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이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어찌 해야 할지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다시 시간을 확인했는데 겨우 세 시였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 앉았다. 말씀을 끌어당겨 손을 모았다. 아이에게 장문의 쪽지를 보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으려니까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이번 주일은 너 대표기도다. 나는 지난 주일에 오지도 못한 아이에게 주보를 만들면서 그리 연락을 하였다. 조금 지나서 전화가 들어왔다. 새벽에 일이 끝나서 지난 주일에 오지 못했다고 했다.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이태원에 있는 무슨 바에서 새벽 다섯 시까지 일을 한다고 하였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니 왜 그런 데서 일을 하냐? 당장 집안이 그렇게 어렵냐? 나의 질문은 바보 같았다. 그게 뭐 어때서, 하는 아이의 반응이 더 속상했다.

 

어쩌면 가장 자주 여러 번 성경공부를 했던 아이였다. 군대에 보내면서도 내내 마음이 쓰였다. 그렇게 군 입대를 하고 여태 보지 못했다.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한 게 다였다. 나는 혼자서 마음을 들었다 놨다, 애면글면 속을 끓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속상해서 다신 연락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다 그래도 못 견디겠어서 다시 안부를 묻고 하였다. 그렇듯 어렵게(?) 연락이 다시 닿은 게 지지난 주였다. 군종병으로 있었다는 말에 놀랍기도 하였다. 사귀는 여자아이가 교회에 다닌다는 말에 안도하기도 했었다.

 

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뭘 하든 뭘 보겠나 싶었다. 왜 하필 그런 데서 일을 하나, 아이에게 쪽지를 쓰다 울컥, 하였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는 일에 대하여 일찍이 바울사도는 엄중히 전하였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왜 하나님이 내 속을 이렇게 들들 볶으시는지 잘 안다. 일어나 앉아 아이에게 쪽지를 쓰며 생각하였다. 주님, 그냥 내버려두실 겁니까? 한 아이는 정신병원에까지 다녀오고도 정신을 못 차린다. 그 앤 나와 한 번도 성경공부를 한 적이 없다. 한 앤 자아를 찾아 인도를 가네 네팔을 가네 하고 돌아와서 여태 얼굴도 보지 못했다. 누군 그처럼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하여 늘 곁을 지키려나 했는데 이젠 연락도 불편해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한데 이 녀석마저 이러는구나, 싶어 애가 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어쩌면 좋을까?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 상실한 마음에 두신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주님 그러지 마옵소서, 그렇게 하지 마옵소서, 나는 기도한다.

 

지난날에 나를 돌이켜 이 길을 가게 하실 때 그 처음을 같이하게 하셨던 아이들이다. 나에게도 그 애정이 남달라서 나는 내가 죽어서라도 저 아이들이 주 앞에서 온전하여지기를 바란다. 내가 너무 하는 게 없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게 너무 속상하고 미안할 뿐인데…. 더러움에 버려두지 마소서.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지 마소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지 마소서.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화장실을 갔다 올 때였다. 이웃하고 있는 사무실 사장이 차 한 잔 하시겠냐며 나를 불렀다. 피로감에 좀 눕고 싶었지만, 저의 사무실로 갔다. 이런저런 불편함을 털어놓았다. 말이 하고 싶은가, 하여 저가 내준 구기자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참을 듣다 나는 저의 두 아이에 대해 물었다. 고1, 중3이 되는 아이들이었다. 탈북하여 나름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데 있어 게임에 빠져, 그저 자본주의의 폐단에 물드는 것 같아 늘 안타까웠다. 한데 아이들 얘긴 잠깐이고 뭔가 메모를 하면서 내게 설명을 하였다.

 

어느 네트워크를 소개하고 무슨 사업을 설명하였다. 한 마디로 다단계였다. 한사코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자신은 매월 백만 원씩이 들어온다고 하였다. 뭐가 어떻고 하며 내 밑으로 세 명만 심으면 최소한 30만원은 보장이 되고 저들이 뭘 또 어떻게 활동을 하면 기본적으로 수입이 보장된다는 거였다. 뭔가 마음이 싸했다. 나는 두어 번 더 아이들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하였다. 큰 애가 글을 좀 쓰던데, 어디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는지. 그에 대해서는 단답으로 쳐내고 저는 마저 이야기를 끌어갔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정중히 거절하였다. 다 좋은데, 아무리 좋다 해도 저는 안 합니다. 그런 나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하며 또 다시 설명을 이어가기를 몇 차례였다. 나중엔 내가 싫어하니까 아내에게 따로 설명을 좀 드려야겠다고 나섰다. 미친다는 게 이런 걸까? 나는 안타까움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기껏 그 어려운 길을 뚫고 남으로 내려와서 이게 뭔가 싶었다. 저를 도왔던 이가 신앙인이었던가 본데, 그래서 일 년 반 남짓 어느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었다는 소리도 들었었다.

 

저는 나보다 더 자본주의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다. 어느 교회에서 탈북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번 여름에 20일간 유럽여행을 가게 됐다며 자랑하였다. 그 꼴랑 탁구대를 들여놓고 나름 이렇게도 해볼까, 한다는 내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정중하게 사양을 하고 돌아왔다. 진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하였다. 소파에 널브러지듯 누웠다가 30분은 족히 혼곤한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안 된다 안 돼. 나는 마음이 불안하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말씀을 읽다 콧등이 시리다. 괜히 눈물이 핑, 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르겠다. 아이한테 괜히 또 뭐라 했나, 마음이 쓰인다. 그냥 그러려니 둬야 했나, 알 수 없어 나야말로 미치겠다.

 

나는 어쩔 수 없어서 주께 집중한다. 내가 왜 저런 일(!)에 저런 애(?)한테 마음을 써야 하나, 싶어서 웃기기도 하다. ‘너나 잘해!’ 하는 내 안의 속삭임이 나를 비웃듯 재잘거리는 것 같다. 탁구대를 괜히 들여놔서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왜 괜히 교회를 했나, 싶다. 그러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게 그러니까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안에 두시는 이 끔찍한 염려가 주의 이름을 되뇌게 만든다. 주가 아니시면 다른 방도가 없다. 얘들을 어쩐단 말인가?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이가 뭘 하겠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외로운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러자고 그 죽을 똥 살 똥 남한으로 온 가족이 목숨 걸고 내려왔단 말인가? 교회가 더 부조리가 많더라는 둥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정직하지 못하더라는 둥. 저이는 고작 교회에서 그런 거나 보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는 취향에 안 맞는단다. 그리곤 애들도 뒷전이고 뭔 네트워크 사업을 운운하는 것인지! 아니, 이 좋은 걸 왜 이해하지 못하세요? 저가 나를 답답해할 때 내가 할 소리였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 25:12).” 오늘 잠언의 말씀이 주옥같다. 말씀에 청종할 수 있는 귀를 주신 게 값지었다. 다들 저마다의 진리를 말하지만 나는 나의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

 

아이가 나의 미력한 쪽지를 읽고 잃어버린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주의 영이 아이의 마음을 감동하지 않으시면 내가 더 무어라 한들 그 소리가 들릴까! 주일에 오너라. 네가 대표기도다. 나는 결연함으로 쪽지를 보냈다.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기를, 그게 아니면 도무지 가망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때로 슬프다. 초등학교 아이들 수업에서 버럭, 소리를 지른 것도 아이들이 너무 해서가 아니라 그 부모들이 너무해서였다. 저들의 과잉보호가 아이들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아쉬울 게 없는 것이다. 겁나는 게 없다. 다만 성가실 뿐이다. 엄마 눈만 피하면 된다. 헬리콥터 같은 엄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시인의 제목처럼 ‘그날’이다. 죽어가면서도 죽는 줄 모른다. 아프지 않은 병은 저주다. 더러 문둥병을 그리 인식하였다. 천형(天刑)이라고도 불렀다. 어릴 때 나환자촌에서 살아본 나는 그게 뭔지 조금은 안다. 모두가 병들었다. 그런데 아픈 줄을 모른다. 그저 죽어갈 뿐이다. 그날이 오늘이지 않나? 아 낚시라도 다녀오고 싶다. 새벽 네 시 반. 나는 아이에게 보낸 쪽지를 다시 읽으며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정말이지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

 

주가 아니시면 나 어디 가리까?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애 3:37).” 허리가 아프고 등이 시리다. 다시 좀 누워야겠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