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잠언 28:5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미세먼지로 짙게 내려앉은 하늘은 무거웠다. 어둑한 실내는 하루 종일 차분하였다. 드러누워 영화를 한 편 보았고 빈둥거리면서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은 하루였다. 오후에는 사장이 건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돌아갔다. 목사님 앞에만 오면 내가 이상하게 말이 많네요, 하하. 저는 거의 혼자 이야기를 하였다. 주일날 아들애가 와서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이웃하고 있는 조산원에서는 새로 아기가 태어났다. 벌써 네 번째 신생아였다. 나는 종일 문을 열어놓고 있었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가 좀 왔으면 싶다가도 오지 않아서 좋았고, 어디 좀 갈까 싶다가도 아무 데도 가기 싫었다. 아침에는 로마서를 소리 내어 읽었는데 새삼 그 의미가 깊었다. 후루룩 읽어나갈 수가 없어서 진도는 느렸다. 새로 사서 읽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인의 제자훈련>도 말 그대로 늘 그렇다. 늘 그런 하루였고 늘 그런 내용이었다. 어떻게 지내?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늘 그렇지 뭐, 하는 말밖에 할 게 없다.
늘 그렇다는 말, 나는 그 일상의 평온함에 대하여 찬양한다. 오늘도 안녕한 하루가 얼마나 귀한 은혜인지 모른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은 그저 그런 날들로 여겨지기 쉬운데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건 그게 아니다. 예비하라는 것,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베드로의 이와 같은 진술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한 말이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일찍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하는 찬송의 가사도 떠오른다. 일상이란 우리에게 두시는 준비 일이다. 평온할 때야 누가 알겠나? 그때 말씀을 읽어두지 않으면 ‘어둠’이 닥쳤을 때는 늦는다. 그때 기도해두지 않으면 ‘풍파’가 왔을 때는 늦는다.
그때가 되면 하겠지, 하는 안이함으로 미루지만 기도할 줄 모르는 기도는 마냥 자신의 요구에만 휩싸이고, 말씀을 보지 않던 눈은 글자가 그 의미가 그 음성이 들릴 리 없다. 위기가 닥쳐보면 그 사람의 본색을 알 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가슴이 철렁해보지 못한 사람이 무슨 회개를 할 수 있을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일상의 함정이란 나른한 영혼이었다. 안이함으로 나태하고 나태함으로 스스로를 놓아둔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13-15).” 이런 말씀 앞에서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두렵다. 늘 보면 나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다. 토해내는 것마다 끔찍한 원망과 고약한 비난뿐이다.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데 듣다보면 모두 남 탓이다. 변명이 끊이지 않는다. 속이는 데 능한 혀와 그 입술로 독을 내뿜는다. 저주와 악독이 가득한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짓밟는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특징은 교묘하여서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5:9).” 뭐 꼭 정치판을 예로 들 것도 없이 일련의 사건에 달리는 댓글을 종종 봐도 우리의 사악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것 같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여서 두렵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어서 말이다. 오늘 잠언은 왜 그런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악은 정의를 깨닫지 못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마이클 샐던의 책이 여전히 베스트셀러를 유지하고 있지만 어림없다. 마치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어서 잠깐 도취되는 정도로 족한 것이지 실제 들어가 살기는 싫은 것이다.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그런데 우리 귀에 들리는 음성은 간단하지 않나?
정의란 주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으로, 더욱 알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데 따른 뉘우침이고 돌아봄이고 그리하여서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의는 참으로 간단하여서 선연하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하나님의 한 의,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8).” 하지만 우린 다른 것이다. 남들이 알 수 없는 권한이며 붙들고 지키는 의지다. 한 마디로 ‘은혜에 속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4:16).” 약속을 붙드는 자들이 성도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이 한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를 그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세상이고, 어쩌다 그리 된 게 성도다.
나는 내가 어쩌다 여기 있는지 가끔은 의아하다. 맞은편에 사장이 앉아 자신이 살아온 날을 두둔하고 있을 때 나도 그렇게 여겼던 돈에 대하여, 성공에 대하여, 보람에 대하여, 잘 사는 방법에 대하여 더는 동조할 수 없었다. 분명히 나도 저와 같이 그래서 사람들을 찾았고 악착같이 산다고 살았으며 나름 선을 도모하며 성실하다고 자부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한데 이젠 그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내가 주를 아는 일보다 중요할 게 없었다. 피식, 웃으면서 그럴 수 있지요! 하고 그저 가만히 있었던 것도, 그러면서 그저 저를 위해 기도하였던 것은, 뭐라고 한들 그 말이 들리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만 어쩌다, 그리 된 자이다. 내가 스스로 깨닫고 돌이켜 의를 찾은 것도 아니다. 많은 독서와 깊은 사색으로 절대 자아인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다. 나는 결코 득도 한 게 아니다. 보살이 된 게 아니다. 아무 공로도 없이 나는 주의 은혜를 입었다. 한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낭패였고, 살아온 날들에 따른 실패였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좌절이었다. 그리 된 게 주의 은혜라는 로마서의 깊은 진리 앞에 나는 감사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어릴 때 그저 막연한 줄 알았던 믿음이 결코 소멸되는 법이 없다. 저도 중학교 때까지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 같아요. 하는 저의 말이 그 중심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가늠하게 하였다.
그저 씨익, 웃으면서 나는 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이 무얼 하시려는 걸까? 잠깐 마음을 두었을 뿐이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럴 수 있게 나를 그 시간 그 자리에 두신 이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신뢰할 뿐이었다. 괜히 그러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딱 십 년 전만 해도 내가 오늘 이러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었나?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그러느라 평생을 소진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평생을 일구는 사람도 있다. 저 둘의 공통점은 영혼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 누리는 누림이 이 땅에서 달랐던 것처럼 영원한 세계에서도 엄연히 다를 것이라는 데 있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공통점은 모두가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곧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그 누림은 공평하지만 질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9).”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설 때면, 오늘 시편의 고백이 내 것이 된 것에 대하여 저절로 감사가 나온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일상의 나른함이 주는 교훈은 크다. 늘 그 날이 그 날 같은 날들이 모여 주를 바라고 구하는 데 유익함을 더한다. 시편을 내 언어로, 내 기도로 주께 되뇔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사울을 피해 굴속에 갇혀서도,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이와 같은 기도가 가능하게 하니까 말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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