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전봉석 2017. 3. 30. 07:52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잠언 30:12-14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시편 59:9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는 한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다. 저는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되어 그 수가 더함으로 안위한다.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으니 가깝게는 우리의 정치지형을 봐도 알 수 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올까? 저자가 어찌 저런 말을 서슴지 않을 수 있을까? 의아해하다가도 저가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무리에 속한 것으로 둘러보면 모두 뜻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저들의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는 데 능하다. 수많은 재산을 두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도 저들끼리 무리를 지어야 마땅하다. 곧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다. 어느 시대나 그러했고 우린 저마다 자신은 아니라고 두둔하면서 또한 자기 것을 지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거 보면 궁핍이란 성도의 덕목이기도 하겠다. 옛 선비들도 청빈을 삶의 두루마리로 삼았다고 하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는 유전인자는 참 자유의 길을 가난에서 찾지 않았나 싶다. 궁핍은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부요함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으며 뇌물과 섬김을 받는 일에서 자유하다. 사람들의 환심을 얻으려하지 않고 저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자신을 과장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홀가분하여서 짊어지고 갈 게 적다. 지킬 게 많은 사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주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 중에 가장 난감한 것이 저의 많은 재물이다. 나름 성실하였고 정의로웠으며 충실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 저의 걸림돌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고백은 깊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곧 성도로서 마땅히 바랄 궁핍은 자원하는 마음이었고, 가난에 굴하지 않는 것으로 오히려 그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를 구할 수 있던 것이다.

 

나는 호언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궁핍을 사랑하지 않는다. 돈이 없는 게 유익한 것은 허튼 데 마음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몸의 제약은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다. 있어서 주를 멀리하는 것보다 없어서 주를 바라는 게 복되다. 있어도 주를 바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있음으로 왜곡되고 희석되고 모호해지는 게 틀림없이 있다. 우리도 있었으면 더했을 거야! 하고 아내와 나는 인정한다. ‘갑질’은 특정한 누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건에 따라 금세 뒤집히는 게 장담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말보다 허망한 건 없다. 성경은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결국 조건이 바뀌고 환경이 달라지자 저주가 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 14:71).” 앞서 그는 으스댔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 예수님은 우리의 장담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지적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0).”

 

그런데 베드로 뿐 아니라 저들은 장담하였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31).” 지금은 그럴 수 있을 거 같다. 궁핍을 운운하면서 마치 나는 가난도 이겨낼 것처럼 군다. 이것으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게 장담이 될 수 없다. 사랑은 고백이지 장담이 아니다. 신앙은 고백이지 장담이 아니다. 절대 나는 그럴 리 없어, 할 때 저주가 되어 돌아온다.

 

전날과 같은 하루였다. 낮에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와서 수업을 하였다. 조금은 짜증스럽고 귀찮았다. 매순간 마음을 추스르지 않으면 금세 내 안에 미움이 들어찬다. 한 녀석은 아예 대놓고 탁구만 치자고 들었다. 결국 모두가 입이 뚱해 돌아갔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렵다면 아이들을 대하는 일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같다. 찰랑거리며 물결이 넘실거리는가 싶다가 금세 펄이 드러난다. 심통 부리는 아이 앞에서 나는 팔짱을 끼고 대꾸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자정능력은 놀랍다. 같이 동조하듯 어수선하다가 말을 잃은 선생을 두고 더는 그럴 수 없었던가보다. 한 아이가 얼른 쓰자! 하니까 덩달아 조용해져서 해야 할 걸 묵묵히 하였다. 나는 유자 가루를 풀어 시원하게 주스를 만들어주었다. 나도 전과 다른 게 있다면 내 할 말을 우선하기보다 하나님을 돌아보는 것이다. 어떻게 하죠? 그럼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게 아이를 나무라는 게 아니라 내 입을 막는 것이다. 내가 오히려 배우는 게 많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뒤미처 아들애가 전화를 하였다. 준비하고 있는 소논문이 계속 퇴짜를 맞아서 혹시 패스하지 못하면 한 학기를 더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였다. 연애를 하더니 정신을 못 차리나? 하고 뭐라 할까 하다, 하나님 앞에서 성실했는지 돌아보고 막판에 더욱 최선을 다하라고 일렀다. 뭐라 한들! 저녁에 딸애는 입을 삐쭉거리다 눈물이 글썽하였다. 새로 원장이 바뀌고 간사도 나이 든 사람이 짝꿍이라 여간 성가신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책임감 없이 당장 그만 둔다 그럴 수 없어, 한 학기 선교훈련생들이 수료한 뒤에 그만두려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여의치가 않은 모양이었다.

 

발을 동동거리며 어찌 거들어 참견하고 뭐라 잔소리를 할 판인데 그럴 거 없었다. 신기하게도 자식 일에는 한 발 물러서게 하신다. 걱정이 덜한 것이다. 오히려 교회 애들보다 말이다. 마음이 쓰이거나 뭣 때문에 안달을 부리는 데 있어서도, 기도가 말해주듯이 다른 애들보다 자식들은 덜 무겁다. 전에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런 얘기가 나왔는데, 어째서 그런가했더니 ‘기도의 값’이 다른 것이다.

 

교회에 나오고 글방에 오는 애들은 그저 안타까운 것이다. 저들의 가난이나 가정 형편이 아니라 영적인 발판이 말이다. 안 믿는 가정에서 안 믿는 부모 밑에서 안 믿는 아이들로 자라는 게 늘 마음에 걸린다. 안 됐다. 그런 데 비해 나의 복은 넘쳐난다.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특혜를 받은 것이다. 하물며 모두의 기도가 있고 자신의 신앙고백이 있으며 하나님의 주관하심이 있는데 뭘 더 바랄 게 있을까! 됐다, 싶은 것이다. 자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하나님이 주도하실 일이다.

 

어쨌든 아내의 한숨이 깊어졌다.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아들에 대한 기도가 구구절절하였다. 어쩔 수 없지. 별 수 있나? 기도밖에는 달리 뭐라 한들. 그래서 나는 뭐라 하지 않았다. 체류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 그만큼 더 고생스러울 텐데, 싶은 마음에서 안타까움만 컸다. 이럴 때 시편은 기도하는 호흡을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 59:9).”

 

주를 바랄 수 있는 힘도 주께로부터 온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16).” 그러므로 나는 완악한 자들과 다르고 그래서 스스로 굳건하여 내 신앙을 장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나 또한 다를 게 없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그러므로 주께 의뢰하는 것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7).”

 

다른 무엇이 더 있어야 할까?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잠 30:32).” 말만 막아도 마음이 훨씬 가지런해진다. 보면 또 말이 늘 화근이 되니까 말이다. 사랑도 신앙도 장담이 아니라 고백이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고백으로 드려지는 거였다. 때론 쓸쓸하여서, 아무도 몰라주는 데 따른 허기가 또 슬픔이 나를 광야로 내모는 것 같지만 것도 어쩌겠나? 하나님은 선하시다.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매일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지만, 나의 영혼도 자라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느끼는 것이 전부일 수 없다.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완전한 묵종의 상태로 우리 영혼을 이끄신다.’ 묵종이란 말없이 따르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알겠다. 지나고 보면 늘 입만 다물었어도 될 일들이었다. 말이 늘 화근이라. 감정이 배고 화가 들끓어 올라올 때 가만히 입을 다무는 것보다 슬기로운 건 없었다. 원래 그게 그렇게 안 되니까, 나는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님!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게 아니라 들숨을 삼키면 날숨이 진정되고 하려고 했던 말은 그 무게를 잃는다.

 

묵종의 상태로 우리 영혼을 이끄시기까지 우리가 고달픈 까닭은 그게 싫다고 바득바득 우겨대는 것이다. 어쩌겠나? 사는 날 동안 끝내 그리 끌려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고,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 내 수고와 노력은 미미한데 누군가의 기도 덕에 오늘 이처럼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보면 기도에 빚진 자라. 기도만이 묵종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잠 30:33).”

 

그러므로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6).” 그저 다만 믿음의 분수대로,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일로,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 성경이 이르시는 직분을 다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