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찌 잠잠하냐

전봉석 2017. 3. 29. 07:47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잠언 29:19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시편 58:1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3).” 그러므로 ‘나는 죽었습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 더할 수 없이 악함에 대하여 나는 두 손 들고 주 앞에 선다.

 

세월호가 올라오고, 이를 두고 다양한 사람의 말들이 오간다. 총체적인 악의 실상이 보여지는 것 같다. 맹목적인 주장과 자기 의만 구하는 바람은 모두 역겹다. 남의 슬픔 앞에 겸손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보응이 따를 것이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시려고 죄로 심히 죄 되게 하셨다. 나는 무슨 말도 보태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절규하는 심정들을 주의 이름 앞에 아뢴다. 주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참 세상이 악하구나. 왜 율법이 오고 계명이 끝없이 덧대어져도 소용이 없는가를 알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전에는 내가 참 잘 살고 있구나, 나름 이만하면 정직하였구나, 성실하였구나, 스스로 자부하였던 것들이 일고에 가치도 없음을 고백한다. 모든 감정의 불편함은 이를 건드릴 때이다. 아니라 하면서도 스스로의 자부심을 견지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하는 자부심으로 우린 서로에게 겨눈 총구를 거둬들일 수 없다. 곧 내가 온당한 것은 네가 부당한 것이다.

 

뉴스를 보다 덩달아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럴 때마다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주 앞에 고한다. 처절한 연약함을 어찌할까? 자녀인지 종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고난과 낭패를 같이 짊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남의 슬픔에서 자신의 권리를 운운하는 자는 결코 자녀일 리 않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위로와 평안만을 바라는 자는, 사회에 함께 살면서도 의무와 원칙만 강조하는 자는,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저에게는 엄격하면 이는 종이다. 남은 그런 것이다. 그 사회의 일원이 아니고 교회의 한 지체가 아니다.

 

고통당하는 이의 슬픔을 마주하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를 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종은 굳이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죄의 종은 사망에 이를 뿐이다. 순종의 종은 거룩하신 이를 바란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6:16).”

 

로마서를 읽으면 깊은 묵상에 들 수 있다. 한 구절을 며칠 씩 되놰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뉴스를 검색하다 세월호가 인양되는 과정이 중첩되면서 나의 하루는 생각이 많았다. 아이가 와서 같이 국어시간에 해야 할 청소년 이슈, 논제 발표 준비를 만들고 탁구를 쳤다. 늘 말도 없고 시키는 것에만 급급해하던 아이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는 은연중에 자꾸 주일을 소개하였다. 내가 아이를 두고 주께 기도하는 게 때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를 ‘중보’라 하면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는 성령의 기도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아뢰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내 안의 성령께서 이를 두고 기도하신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실제의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그래서 순종의 또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다. 무던함으로 바라는 게 된다. 이때 성령이 개별적으로 기도하신다.

 

그것이 또한 주님의 기도였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이를 위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나는 이 한 구절 앞에서 오래 머물러야 했다. 내가 모르는 나의 기도도 있는 것을 알았다.

 

문득 내가 왜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나? 싶던 의문이 풀렸다. 저 애가 나와 무슨 상관인데 내가 저 애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나? 싶었던 게 말이다. 기도 가운데 기도가 있었다. 내가 아뢰는 것 같으나 성령이 기도하고 계셨다. 심지어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성령이 하시는 거였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그런 거였구나!

 

자면서도 끙, 하고 돌아눕다 말고 ‘주님’ 하고 부르던 나의 습관적인 아룀의 정체였다. 선잠을 깨서도 느닷없이 ‘주여’ 하고 부르던 게 실은 이어지는 생각 속에서 누구를, 무엇을, 어떤 것을 위한 기도이었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아! 막연한 우연으로 그저 또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무작정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였다. 그에 따른 응답인 것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오늘의 나는, 죽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때론 얄밉고 그래서 꼴도 보기 싫은 아이를 왜 자꾸 떠올리며 불편해하나 이젠 그 정체를 알겠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면 그만인 일을 두고 연거푸 또 생각하게 하시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기도하게 하시려고 내 안에 억울함도 두신다. 기도하게 하시려고 슬픔 가운데 머물게도 하신다. 기도하게 하시려고 나를 불 가운데 던져두신다. 성령이 기도하게 하시려고 말이다.

 

그런 가운데 거짓 기도도 있겠다. 쓸모없는 기도로 오히려 위험한 기도들 말이다. 가령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그 뜻을 꺾으려는 기도가 그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걸 전제로 하지 않는 기도다. 그래서 하나님의 실수를 또는 하나님의 방심을 지적하려는 기도겠다. 그래서 드러나는 건 자신을 위한 기도다. 기승전, 자신이다. 자기 기도에 함몰된 기도다. 입만 열면 요구사항으로 가득한 기도다. 심지어 자신이 자신을 바꾸려고 든다. 곧 맹목적인 기도와 자기애에 의한 기도는 그 응답이 오히려 위험하다.

 

그런 기도 앞에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 곧 우리의 기도는 형제를 위한 게 되어야 한다. 남을 위한 게 날 위한 것이다. 한데도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시 106:14).” 들들 볶듯 고집을 부리는 기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15).” 기껏 기도 응답이 있은 후에 오히려 주를 멀리하게 되는 경우다.

 

그렇게 바라던 시험에 합격하고, 승진을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병이 낫고, 오히려 그 영혼이 오히려 쇠약해지는 경우도 그런 경우겠다. 그런 거 보면 ‘기도는 일이다.’ 일부러라도 정해진 시간에 정한 바 매뉴얼에 따라 ‘일처럼’ 준행하는 게 필요하다. 하나님을 닮은 제 일 수단이 기도이겠다. 그 취지와 목적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중에도, 성령은 이를 영적인 언어로 변환하여 날 위해 주께 기도하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왜 성경은 경고하시는지 알겠다. 분별의 영이 내 안에서 날 위해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저 하늘 보좌에서 날 위해 기도하신다.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로 인해 오늘의 나는 건재할 수 있었다.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결과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기도응답으로 내가 오늘은 주를 바란다. 나의 기도로 언젠가 저가, 그 아이가, 이 일이, 사건이, 상황이 그 답을 찾을 것이다. 어떤 해결도 기도보다 빠를 수 없다. 성령의 기도보다 확실한 건 없다.

 

아이가 돌아가고 문득 아이와 수업을 하고 탁구를 치고, 그러는 동안 아이가 주일에 나올 수 있기를,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들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나를 마주하였다. 공부방에 새로 중2 여학생이 수업을 하게 됐는데, 나는 아직 아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근데 벌써 저 아이가 글방으로 올 수 있기를, 후에 함께 주일을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설마, 여학생이 좀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마음이 이를 염두에 두게 하시려는가? 생각하였다. 마치 씨앗처럼 툭, 던져지면 아이를 품는 흙이 되어 그때부터 주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갈망하게 되는 거였다.

 

이는 전적으로 나의 계산된 생각이거나 의도한 바가 아니어서 더욱 놀랍다. 하나님이 이를 어찌하시려는가? 생각함으로 즐거운 것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가령 아래층 아이는 여전히 우리의 난제다. 이제 아홉 살 그 잔망스러운 것이 돌아다니며 공부방을 끊었다고 더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 재잘거리는 모양이었다. 전화도 씹고 밖에서 보면 뚱하니 그냥 비껴지나간다. 이런! 마음을 두고 애쓴 게 꼭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또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불친절한 친구’로 또는 ‘불의한 재판장’으로 혹은 ‘이상한 아버지’로 묘사하신 예수님의 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눅 11:5-8, 1-13, 18:1-8). 결과론적으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그러므로 기도는 응답을 전제로 한다. 하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 응답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닌 것이다.

 

사탄도 이를 이용하였다. 욥을 통해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참 그리스도인은 ‘죽더라도, 곧 들어주시지 않더라도’의 기도에까지 나아간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리고 저는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남을 위한 기도로 드려졌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42:10).”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와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의 기도가 괜한 게 아니었다. 돌아 맞아 주어가면서도 ‘저들을 위한 기도’를 하였던 스데반이나 십자가상에서도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주시기를 애원하였던 예수님의 기도가 그런 거였다. 기도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기도밖에 답이 없다는 말이 이제는 조금 실감이 난다. 그러느니 나가서 싸우겠다고 우겨대던 나의 마음이 어줍었다. 여러 번 마주치는 글방의 같은 층 아이를 두고 생각하고 기도하게 하시는가 하면, 그 복도에 늘 늙으신 모친들로 북적거리는 옆 사업장의 지날 때마다 기도하시는 게 있었다.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했던 게,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었다. 내 기도는 줄어들고 주님의 기도가 늘어가는 거였다. 내 몸을 위해 아뢰고 나 살 궁리에 지쳐 드리던 지청구 같은 기도는 사라지고 뜬금없이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아니 아직 보지도 못한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명령이셨다. 곧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오늘 잠언의 말씀이 그렇게 이해가 됐다면 말이 될까? 내가 그저 알고도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죄의 종이었던 거였고, 이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의 뜻을 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순종의 종이었다.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잠 29:19).” 따르지 않는 나의 죄악된 속성을 아시는 주께서 대신 날 위해 빌어주신다. 그런 우리에게 호통 치시는 것 같다.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시 58:1).”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리하여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