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전봉석 2017. 3. 31. 07:48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10, 30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

시편 60:11-12

 

 

 

일상은 소소하여서 가볍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움직이고 그 행동반경에서 나의 휴대거리는 안녕하였다. 혼자 있다는 게 익숙할 법도 한데 보면 때로 너무 고독하여서 외롭다. 같은 공간을 나누어 쓰고 있는 사무실들은 거의 늘 비어있다. 그래서 오전엔 인기척도 없는 복도 문을 열어두고 소리 내어 또박또박 성경을 읽는다. 기도를 적어두고 맡아서 간직해야 할 이름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었다. 어제처럼 커피를 내려 마셨고 전날과 같이 어슬렁거리듯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늘 행동반경이 같으니까 몸도 마음도 큰 변화가 없겠어요! 아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나의 일상이 늘 그날이 그날 같다는 것을 아는 아이였다. 그렇지 같다. 매 날이 다르다. 나의 대답은 싱거웠고 질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 나름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정직하게 몸을 돌본다고 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어서 하는 소리였다. 슬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고 그럼 기도하고 그럼 찬송하는 것,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하였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마 16:22).”

 

아이는 병적으로 자기 말에 책임을 지려하였다.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가라사대>를 읽고 그 의미를 살피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목요일은 아이도 나도 그 시간을 위해 비워두었다. 두 시간 반 동안 설전을 벌이듯 성경공부가 이어졌다. ‘밀가루’를 먹어서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나는 심리적인 요인으로 보지만 아이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씀을 나누면서도 아이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렇군요! 그렇다는 것이군요?’ 더는 가까이 오려하지 않았다. 거절당한 아픔이 있나? 나는 생각만 하였다.

 

무슨 말 끝에 ‘첫 사랑’ 이야기가 나왔다. 세월은 나의 이야기와 이야기의 경계를 허물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덧대어진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웃자란 말은 내 안에서 여전히 우글거리고 있었다. 설마, 싶었는데 어떤 그리움이 코끝을 찡하게 하였다. 이야기의 결은 추억의 무늬를 가진다. 내가 그랬었구나! 나의 유년시절이 사무쳤다. 그런 거보면 나에게는 사랑도 고단하였다. 하지만 이제 기억은 닳고 닳아서 그 끝이 밴들거렸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 추억이다.

 

허기져서 그만두었다. 열한 시에 시작했는데 곧 두 시가 될 거였다.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묵상이 ‘쉼’에 대한 바람을 가지게 하였다. 칠 일째 되는 날 하나님은 안식하셨다. 그날을 복 주어 우리로 구별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안식,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안식처럼 이 땅에서의 안식은 쉼을 기대할 수 없었다.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출 16:29).”

 

쉴 줄 모르는 이 땅에서 어쩌면 고독은 쉼의 맛을 느끼게 한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아이와 내려가 식사를 하고 당구를 치고, 뒤이어 중2 아이가 와서 글을 쓰고 같이 또 탁구를 치고, 나는 여섯 시가 넘어서야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었다. 고단함은 상대적으로 쉼의 맛을 더하였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20:8).” 기억해야 하고 거룩히 지켜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맛이다. 이는 명령이고 동시에 훈련이다.

 

혼자 있는 시간, 늘 같은 반경으로의 움직임, 하는 일, 생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이제 덧없음을 말하지 않는다. 영원함이 깃든 세계는 소란하고 조급하고 조악하지 않다. 어쩌면 성도가 성도를 알아보는 첫 연대의 느낌은 고독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처럼 고독하신 이가 또 있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이내 십자가 위에서의 절규는 가히 고독의 극치라 하겠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쩌면 고독의 자리는 버림받은 자리다. 세상으로부터, 사랑하고 귀히 여기던 것들로부터의 버림받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확실히 말씀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리고 두어 시간 글방에 혼자 있으면서 나는 알 수 없는 사무침을 느껴야 했다. 누가 쿡, 찌르면 금세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공연히 ‘첫 사랑 이야기’를 해서 그럴까? 눈을 감으면 여전히 아련한 수런거림 같은 것이다. 아스라이 기억이 닿는 마을은 수채화 같다. 같이 놀던 동무들도 기억이 났다. 어린것들이 뭘 안다고, 세례를 받기에 앞서 우리는 기도모임을 가졌고 설교원고를 돌려보았으며 서로를 축복하였다. 당일 날, 어쩌면 부활주일이었을까? 어쩜 그렇게 펑펑 눈물을 흘렸었는지 모른다.

 

예닐곱 명의 동무들은 성령의 뜨거운 은사를 체험했다. 그 가운데 여학생 둘은 사모가 되었고 나를 비롯해 남자 애 둘은 목사가 되고 하나는 선교사가 되었다. 다들 어디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훗날 두런두런 우리의 추억을 들추며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재잘거릴 날이 올까? 안식이란 그리움 같은 거였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 같은 거였다. 에덴에 두셨던 그 안식, 심원의 평강을 사람 속 유전인자는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나는 혼자 누워 어둑한 글방에서 생각하였다.

 

성경에서 성도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하는 신부로 묘사된다.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이해로 내 이야기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 참 안식의 놀라운 쉼을 예비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제 아무리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이는 다만 모형으로 오직 주를 경외하는 자가 칭찬을 받을 것이다. 나는 오늘 잠언을 여러 번 되뇌며 내가 주 앞에 현숙한 여인이기를, 주를 경외하는 지혜로운 신부이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10, 30).” 내 안의 현숙한 여인은 고독을 마다하지 않는다. 조용히 주를 바라며 참 안식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두시는 고독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자처하여 생기는 고독이고 외로움이고 슬픔이기도 하다. 뭐랄까, 잉태한 여인의 마다하기 싫은 고통이라고 할까? 고통이지만 고통으로 포기할 수 없는 고통이다. 고독하지만 고독으로 주저할 수 없는 고독이다.

 

하나님을 모심으로 내 안에 이는 고독은 참 안식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오후께 나의 생각은 어설프지만 들었다 빠졌다를 반복하면서 갯고랑을 따라 흘러드는 바닷물 같았다. 거기엔 예전에 맛보았던 아름다움이 있었고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내 기억 속의 소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 시간, 갯고랑을 따라 들고 나던 저 무념의 바다를 사무쳐했는지도 모른다.

 

물은 강을 지나 바다로 흘러들면서 그 수런거리던 소리는 잦아든다. 졸졸거리며 요란하게 골 깊던 산길을 따라 흘러내렸던 물은 개울을 지나 도랑을 거쳐 천(川)을 이루고 내를 만나 그 소리는 깊어져 이내 강 하구에 이르러서는 바다를 이룰 때면 잠잠하여진다. 우리 안에 천국을 그리워하는 유전인자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쉬고 싶다는 말, 그저 막연히 고단하여서 드는 생각이 아니라 심원의 평안이다. 처음 사람 아담이 맛보았을 짧은 한 나절의 평온함이었다.

 

그런, 하나님의 안식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지식으로 얻은 게 아니라 직감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그저 난감하여서 아련한 시선 속에 넣어두게 된다. 이를 귀히 여길 줄 아는 게 현숙한 여인이다. 저의 현숙함은 주를 경외함에서 나온다.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어질고 바를 수 있는 것은 정숙함에 있다. 들내고 가벼운 것들의 비명으로 가려진 시공(時空)이다. 그러므로 내가 느끼는 고독은 쓸쓸하고 외로운 쪽보다, 심심하여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무료이기보다, 어짊으로 착하고 너그러운 온유함에 가깝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 그 궁핍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분과의 쉼을 열망하는, 그래서 안달하기보다 가만히 내어드리는 시간의 절정이 되기도 한다. 이를 훼방하는 것이 일이고 사람이고 의무고 책임이었다. 우리의 대적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고독의 장소로 이끄신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 감히 단언하건대 불현 듯 내가 느끼는 고독은 그러므로 값지었다.

 

나는 시편의 기도를 호기롭게 따라한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누구보다 사람을 그리워하다 그보다 더 큰 대적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처럼 악전고투하며 살 일이 아니었다. 주님은 우리더러 싸워서 이기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승리하신 그 싸움을 누리라는 것이고, 이는 곧 쉼을 더하시는 안식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시 60:11-12).” 내가 승리해야 할 싸움이 아닌 것이다.

 

나는 다만,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내 곁에 두시는 아이와 일과 상황을 위해 ‘입을 열지니라.’ 기도하고, 가르치고, 저를 위해 ‘신원할지니라.’ 예수님이 계실 자리에 나를 두신 거였다. 참 안식은 십자가였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예수께서 친히 고초를 당하신 길에서 내가 또 고초를 당한다고 하면 그게 모욕적이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게 아니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오히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안식을, 쉼을 우리에게 내미시고 있다. 어쩌다 아이는 이 대목에서 풋, 웃었다. 와 닿지 않아서 말이다. 성경이 약속하시는 이 말씀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주의 긍휼하심을 구하였다. 아이의 냉소적인, 다분히 경험에 의해 실망한 그 아픈 기억에 대하여 짐작하였다. 그러다 나의 첫 사랑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었을까? 때론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이런 처분을 참고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고독한 것이다. 이를 나서서 개선하려고 드는 게 세상이면 이를 품고서 그리워할 줄 아는 게 현숙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 앞서 간 성도의 기도가 오늘의 응답이 되어지는 거였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