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3 주일
잠언 12:28
지혜의 길
12:28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주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다리는 자이다. 심판을 기다린다는 게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지만, 가령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들은 그 억울함을 호소하며 공의로운 심판을 바란다. 빼앗긴 자들의 소망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곧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지혜가 무엇인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아는 일이다. 필연코 그 날은 온다. 싫든 좋든, 인정하든 부정하든, 죽음이 우리 앞에 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여 우리는 그 길, <지혜의 길>을 살펴볼 것이다. 주어진 인생길을 가는 동안 우리에게 어떤 길이 지혜의 길일까?
1. 본성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자.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1).”
본성은 자연적인 성질이다. 훈계와 징계를 싫어하는 건 본능적이다. 내버려둬,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형태다. 성경은 이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셨다. 먼저는 자신의 형질을 다스려야 하고, 주어진 상황을 다스려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에덴은 오늘 우리의 환경이다. 경작함은 밭을 갈아 농사를 짓는 일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왜냐하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2. 악은 인생을 무너뜨리고, 의의 길에는 생명이 있다.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3, 21, 28).”
거짓은 빠르다. 요령껏 하는 눈속임은 간편하다. 악은 달콤하다. 그럴듯하지만 굳게 서지 못한다. 이를 성경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로 비유하셨다. 저들의 특징은 말씀을 듣지 않는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 우리가 다른 것은 저들보다 대단히 나은 수고와 애씀이 이루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뿌리를 말씀에 두고 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같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그러므로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3. 서로를 격려하는 조력자로 살자.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4).”
누구든 자기의 이익을 구하고,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한다. 부모도 다르지 않아서 흔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본심이 늘 있다. 그것으로 서운하고 억울하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어진 성품으로 상대의 면류관이 되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일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받을 줄로 여겨 주는 것은 선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4. 굽은 마음을 다스리자.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8).”
평소에 늘 삐딱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 흔히 부정적이고, 뭐라 하든 순종하지 않는다. 이런 자는 마음이 굽은 자이다. 저의 세상은 늘 기울어져 있다. 뭘 해도 억울하기만 하다. 누구의 칭찬도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다. 재고 따지고 망설이다 제풀에 시들 한다. 그런 자는 멸시를 받는다. 문제는 자신만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멸시로 저는 더욱 무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욥 15:35).” 뭔가에 눌린 자아는 왜곡된 세상을 그려낸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시 141:4).”
5. 성실과 근면은 하나님의 질서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11, 24, 27).”
요즘은 뭘 해도 진득하니 하는 경우가 드물다. 저는 자기 토지를 경작하기보다 남의 밭을 기웃거리느라 바쁘다. 항상 남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인다. 말씀은 이를 엄히 경계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자기 변덕에 휘둘리면서 하나님을 탓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열심의 기초는 주를 섬기는 데 있다. 이는 내 것이 아님을 아는 일이다. 저는 조심히 산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6. 온전한 언어는 축복의 가늠좌다.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13-14).”
늘 보면 자기 말에 걸려 넘어진다.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시 64:3-4).” 총구를 겨누는 말을 쏘아대는 경우에 대하여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잠 26:9).” 오늘 날 엄마의 지나친 참견과 아빠의 무분별한 질책이 아이들을 멍들게 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7. 교만은 가장 악하고 어리석은 태도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15).”
교만은 자기 행위를 바른 줄 아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의 권고도 듣지 않는다. 이렇듯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눅 18:9).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 나름 옳은 것이다. 이만하면 됐지 뭐, 싶은 것이다. 마음이 높아지면 뜻이 악하여지고 모든 영광을 빼앗기게 된다.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단 5:20).”
이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8. 정직은 궁극의 유익이다.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17).”
정직은 진리에 가장 가까운 데 있다. 저는 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지혜의 길은,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6-17).” 곧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 4:25).” 곧 오늘 본문에서,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 12:19).”
9. 복음의 길이 최종적인 지혜의 길이다.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하느니라,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26, 28).”
뭘 하든, 한 세상이다. 믿든 안 믿든, 한 생은 간다. 다들 저마다 자신의 적성을 따라, 환경과 형편에 맞게,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이에 나는 보다 적극적인 복음의 삶을 권하고 싶다. 물론 주방장은 열심히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과학자는 새로운 연구에 전념하며, 선생은 바르게 가르치고, 장사꾼은 정직하게 장사를 하면 된다. 자, 다시! 그래 맞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가장 선하고 의로운 길이 무엇일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말씀을 전하는 일보다 보람된 길은 없다. 예수를 알리는 삶보다 값진 생명은 없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보다 복된 것은 없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2-13).”
나오는 말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려하지 않는다. 좁고 협착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덜 열심이었으면 좋겠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느라 주일을 빼먹고, 너무 열심히 돈을 버느라 참 보물을 쌓을 겨를이 없고, 너무 열심히 사랑하느라 하나님의 사랑을 등한시하고, 너무 열심히 자기 일에 충성하느라 그 뜻을 분별하지 못하느니,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30).”
‘불구된 자’로 온전함이 유익하다. 빙충맞게 살지언정 지혜의 길을 이루자. 오늘 본문은 이를 바란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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