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언 1:32-3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편 61:3-4
열심이 우리를 삼킬 수 있다. 그것으로 자랑을 삼고 그것에서 희망을 찾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보다 바쁘면서 어느새 주의 의도는 안중에도 없다. 따라오시라. 주를 앞서 간다. 같은 층 목사내외가 놀러왔다. 마침 설교 원고를 탈고하고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 때였다. 두어 시간, 저의 사역의 이런저런 면모를 들려주었다. 참 일이 많다. 스스로도 말하길 일을 자꾸 벌이는 편이다. 글쎄. 상대적으로 나는 너무 빈궁하였다. 두어 시간을 그리 붙들려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수업을 왔다.
그러게. 한 주가 또 금방 갔다. 월요일이다 싶었는데 뚝딱, 금요일도 지났다. 서른 장의 메모와 함께 290쪽 분량의 책 한 권을 간신히(?) 읽었으며 열한 명의 아이들이 번갈아 다녀가면서 누구와는 글을 썼고 누구와는 성경공부를 하였다. 옆 교회 목사내외와 양쪽 사무실 사장들이 잠깐씩 와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갔다. 이처럼 나열할 것도 없는 일들이 나의 일상을 채우다 지나갔다.
별 볼 일 없는 일상 가운데서 나는 씨름하였다. 혼자 끙끙 앓거나 누구를 생각하며 주께 아뢰거나 같은 말 같은 같은 말 아닌 말씀을 여러 번 읽다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일처럼 나는 혼자서였다. 전날엔 외롭다는 데 치를 떨었고 불쑥, 고독의 의미를 새삼 부여하면서 묵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묵상,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머무는 일, 가만히. 그러는 동안 마음은 저 혼자 지지고 볶고 난리도 아니었으며 세상은 뒤집어지고 대통령은 구속되었다.
때로는 너무 막연하여서 ‘이 길이 맞나?’ 새삼 궁금하여지고, ‘나 여기 있어요!’ 하듯 졸지에 양치기소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전혀 드러나지도 않는 일에, 그러면서 나의 ‘아버지’ 하고 부르는 날숨이 들숨을 재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의 전율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주 앞에 탄식하듯 내어드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내가 저 아이들을, 이 교회를, 여기에서 무얼 꼭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놓아두신 데 따른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특권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젊은 사역자 내외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럼 소는 누가 키워요?’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교인이 떠나가고 자녀들이 힘에 겨워하는 걸 훈장으로 여겨서야 쓰나… 사모님이 힘드시겠어요! 나의 말은 비루하여서 허공을 지나 저쪽으로 밀려가지 못하였다. 다음에 다시 말해야겠다. 혼자 생각하였다.
여기에 어떤 이단이 들어오려고 하고, 이 건물만 해도 어디서 무슨 파가 기웃거리고 있으며, 그래서 누구누구 목사들이 중심으로 합심하여 대적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있고, 어느 교회가 지역을 돌보지 못해 어디서 그곳을 잠식해버렸다는 둥. 이어지는 말 앞에서 나는 어지러웠다. 누구는 전투적인데 나는 비굴한 것일까? 마음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데 대해 조금 의아해하다 말았다.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머리에 맴도는 이 말씀을 혼자 되뇌다 삼켰다. 공연히 훈계하는 소리로 들릴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내가 나를 두둔하려 드는 것 같아서도 말이다. 섬김의 과정에서 느끼는 소외감이나 고독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고독은 때로 미세먼지보다 지독하여서 숨을 멈추지 않는 이상 내 안으로 파고드는 걸 막을 길이 없다.
그저 내 눈엔 자꾸 피로해 보이는 사모가 안쓰러웠다. 어디 가면 또 같은 말을 할 텐데 그러는 동안 저렇게 또 곁에서 졸린 눈을 참고 있으려나, 생각하다 내 생각이 한심하여 풉, 웃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왜 자꾸 이 말을 하고 싶었을까?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알고 봤더니 저가 순복음교회에서 자라 순복음의 열심을 밟아서 목사가 된 이였다. 그러게. 열심이 열심을 재촉하는 것이다.
나야 늘 거저먹는 사람이다 보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는 주의 음성이 제일 크게 들린다. 왜 주님은 우리를 보내시면서 평강을 있다는 걸 강조하신 것일까? 우린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굳이 일하는 자이면 예술가다. 장인인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해두신 일터에서 소신을 순종으로 바꾸고 확신을 겸손으로 연마하며 나름의 신념을 긍휼하심에 녹여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저들을 재련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미 주께서 이루신 구원을 나의 삶에 녹여내고 단련시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 누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할 게 아닌 것이다. 나는 이제 ‘너나 잘해!’ 하는 내 안의 소리에 순응한다. 어디서 이단이 득세하고 누가 사탄에게 끌려가고, 세상은 점점 어떻고 하는 이 모든 일들 앞에서 나는 더욱 주만 바란다.
솔직히 매우 근사한 모습 같지만 실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말이다. 그냥 있어도 되나? 싶었던 조바심이다.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의기투합해서 같이 으싸으싸 하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그럴까봐 나를 미리 꼼짝 못하게 하셨다. 뭐가 어렵다고, 나는 슬그머니 안정제를 꺼내 삼켜야 했다. 새로 공부방에 오고 있는 중2 여자아이가 있는데 얘가 또 지독하게 가난한 집의 아이인가 보다. 또 누가 글방에 오는 아이 때문에 그게 부러워서 공부방엘 보냈으면 한다나? 하는 소릴 듣고, 난 그냥 가만있으면 된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게 나는 내 자리에 있으면 된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할 일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그런 걸까? 나에게 뭘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했나? 고개를 갸웃하다 것도 그만 생각하였다. 아무렴 어떤가. 나는 저의 열심이 행여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의 어기적거림이 하나님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게 아니기를 기도하듯이 말이다. 다 주가 하신다. 저는 저에게 나는 나에게,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는 건 참으로 다양하여서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게 합해져 선을 이룬다고 하니 경이롭기만 하다.
문제는 자꾸 내가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이를 삼가야 한다. 의미를 두어 그 깊이를 측정하고 보다 진중하게 주의 뜻을 살피는 데 유용하지만 행여 그것이 주가 되면 남을 판단하고 공연히 주님의 뜻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의미 또한 그저 개별적이어서 누가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판단하느냐가 중요한 게 주님의 뜻을 바로 살피는 게 중요하였다. 가령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주께 부었을 때 많은 사람이 각각 저마다의 의미를 두어 이를 판단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마 26:8).” 같은 일을 두고도 저마다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9).” 우리는 저마다 설득력 있는 논리를 구사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상황을 구성하고 내용을 재해석하려 든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비논리적이다. 어찌 저와 같은 허비를 ‘좋은 일’이라 여기시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매사에 어떤 일을 정의하는 의미다. 임대아파트촌 아이들이 무력하게 방치 돼 있고, 이단이 심상치 않게 이 지역 사회를 노리고 있고, 어느 교단이 무슨 교리로 충돌하였으며, 모 교회가 세습에 눌려 풍비박산이 날판이고,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러니 힘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인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
우리가 간과하는 일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1).” 살면서 새삼 어디까지 가서, 누굴 따로 만나서, 무슨 일을 도모하면서까지 발굴하고 탐사하고 지지하고 돋우어야 할 게 아니라, 늘 곁에 두신 이로 족한 것이다. 엘리베이터 한 번 잡아주고, 청소하는 이에게 웃어주고, 물건 살 때 깎지 말고, 관리실 아저씨한테 친절하게 구는 것이면 된다. 뭐 그렇게 유난을 떨 듯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들! 공연히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까 두려운 것이다.
오늘 잠언의 말씀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역사를 되돌리려 하듯, 뭔가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하듯, 저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 땅에 정의를 위해 애쓰는 것 같지만 이는 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와 같다. 굽이굽이 우리 역사만 해도 더했던 날들이 셌다. 그때마다 의를 부르짖고 다들 충성된 역사의 노예를 자처했다. 그래서 오늘 날 이지경이다. 그렇다고 ‘미련한 자의 안일’이 돼선 안 될 일이어서 ‘오직’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평안을 나는 사랑한다. 이것이 행여 미련함에 의한 자기만족이 아닐까 하여 다시 또 주의 말을 듣는다. 결국은 주께 좋은 일이 좋은 일이다. 주께 좋은 일은 나를 평안하게 하신다. 내가 말씀 안에서 평안한 것이 주께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주의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어 사는 일, 이를 오늘 시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시 61: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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