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전봉석 2017. 4. 12. 07:38

 

 

 

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잠언 12:21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시편 72:3

 

 

 

자유하기 때문에 내가 저 애를 생각하고 주의 이름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거였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누구를 생각하는 데 있어 어떤 이익을 우선 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한데 이제는 내 일도 아닌데, 돈도 되지 않는데, 쓸데없는 일인 것만 같은데,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더는 육의 소욕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 왜 그처럼 내 안에 다툼이 쉬지 않나 했더니 것도 건강한 거였다. 가만히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의 어떤 절절함에 대하여,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시는 말씀이 귓가에 들린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

 

당장 낼모레 원고를 보내야 하는데 주말 내내 아이는 한 번도 자신의 원고를 들여다보지 않고 왔다. 일일이 교정을 보고 덧붙였으면 하는 내용을 첨가해주었는데도 아이는 별로 의욕이 없는 것이다. 한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이를 어쩌나 싶어 망설이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하고 물러섰다. 같이 탁구를 칠 때면 반짝, 아이는 아이다워진다. 도통 의욕도 없고 지나치게 수동적이며 무슨 말만 하면, 엄마가요… 하고 말을 돌린다. 속엣 얘길 나누고 싶다가도 그 또한 여의치 않아 그냥 둔다.

 

물론 ‘열심의 함정’은 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4:17).” 어떤 열심은 자신을 삼킨다. 주의 뜻을 운운하지만 자기만족으로 행할 때가 더 많은 것이다. 나는 이제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쩔 수 없어서 기도한다. 달리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 때문이기 보다 나 자신 때문에도 말이다.

 

그 가운데 늘 신기한 건, 아침에 올라와 소리 내어 읽은 말씀이 종일 지침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냥 손에 잡혀서 순서에 따라 읽는 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날 위해 쓰여 읽어주시는 것 같다. ‘성찬의 삶’으로 드려지는 게 성도의 삶이었다. ‘찢긴 빵’으로 ‘부어진 포도주’로 우리는 주의 살이며 피를 나누는 삶이어야 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러니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것.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 떠오른다. 주인공 어니스트는 계곡의 표정을 보고 그와 닮은 이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막연한 게 아니어서 자신이 그와 마주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된다.

 

이에 등장하는 계곡 출신의 상인으로서 갑부가 온다. 저가 그인가? 하고 기대했다가 저의 탐욕을 본다. 그 뒤 계곡 출신의 은퇴한 장군이 온다. 저가 그인가? 하다 저의 공명심에 주춤한다. 다음으로 계곡 출신의 정치가를 만난다. 저가 그인가? 하다 사람의 위선을 엿본다. 마지막으로 자연을 노래하는 위대한 시인을 만난다. 어니스티는 틀림없이 그가 자신이 기다리던 자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시인은 어니스트에게서 ‘큰 바위 얼굴’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 작품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 성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우리의 기다림은 결코 막연한 게 아니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를 챔버스는 ‘성찬의 삶’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내가 주의 살이 되고 내가 주의 피가 되어서 곁에 두시는 이에게 주의 맛을 전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가 의도하고 작정하던 모든 낱알은 갈아지고 으깨져서 형체도 없이 가루가 되어 떡이 되고 즙이 되어지는 것이다.

 

정말 그렇구나, 싶다. 아이에게 실망하다 그게 나였다는 사실에 놀란다. 예전에 날 닮은 사람들로 주께서 곁에 두신다. 왜 내가 얘 때문에 이처럼 시달리나 싶었더니, 그게 결국 나였다. 왜 저 사람이 그렇게 안 됐고 답답한가 싶었더니, 내가 그러고 살았다. 그런 나를 오늘에 이르러 주만 바라게 하시는데, 내가 주를 닮아간다는 것은 주의 눈으로 곁에 두신 이에게서 예전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할 수 없으나, 사랑할 수 없는 나를 사랑하신 주의 사랑으로 저 아이를 대하게 하신다.

 

아이가 돌아가고도 얘를 어쩌면 좋을까? 하고 주 앞에서 궁싯거렸다. 결국 내 곁에 두신 덴 다 주님의 의도가 있었다. 예전의 나를 돌아보게 하심으로 주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묵상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주의 은혜로 내가 저 애를 또는 누구를 대하며 사귀며 사랑하게 하시는 거였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

 

점심을 먹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 개는 네 발로 딛고, 딛는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봄날을 더듬었다. 만개한 벚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자연은 사람보다 정직하다. 바람은 아직 차가웠으나 훈훈하였다. 서로의 걸음에 맞춰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문득 맞은 편 유리에 웬 노인이 하나 서 있었다. 마주하고 한참을 쳐다봐도 낯설었다. 어느새 생의 반을 훌쩍 넘겨 백발이 성긴 머리는 힘없이 바람에 날렸다. 현실의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어찌 관여하여 나를 오늘에 두셨는가를 생각하였다. 그리 할 있어 다행이었다.

 

‘내가 전에는’으로 시작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이와 같은 자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내가 어떻게 주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는지를 바로 알 때,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갈 수 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13).”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자기 업적은 잊어버리고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나’를 기억함으로, 나의 작음을 들어 사용하시는 주의 긍휼하심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심지어 내가 나였던 때의 혐오스러움에 대하여,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내가 죄인 중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주의 구원이 내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나의 본 모습 앞에서, ‘미쁘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는 말씀 앞에서, 내가 어찌 저 아이에게 실망하고 한심하다고 돌아설 수 있나? 그럴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은 그게 오늘의 나로 여기에 두신 이의 마음일 거였다. 어느새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의도하고 꾸며 과장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어찌… 하는 순간에 내가 저 아이를 주의 마음으로 다시 보게 된다. 최소한, 탁구대를 들여놓고 비록 10대 0으로 시작하는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그래서 아이가 웃는다!

 

예배에 나오게 하는 일이야, 어찌 내 뜻대로 되나 어디.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 답답함으로 주의 자비하심을 바라고 구하고 있던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셨던 일을 되새길수록 내가 누구로 실망하는 일 따위는 그야말로 염치가 없는 일이 되었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던 나를 마주해야 하는 일은 민망스럽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지나온 면면에서 죄를 발견할 때면, 나에게 향하신 주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아, 그래서 오늘 잠언은 그리 인도하는구나. 결국 의인으로 하여금 재앙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기꺼이 고난도 허용하시는 거였구나! 그리하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고로 “의인에게는 어떤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잠 12:21).”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이를 사람보다 먼저 아는 것이 계절이었다.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시 72:3).”

 

그러므로 나는 이제,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8-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