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
잠언 13:12, 19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 73:26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그 증거는 내 안에 주의 영이 계심으로 이와 같은 말씀에 반응하는 거였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 전과 다를 바 없이 걱정은 앞서지만 주를 바라는 마음은 더욱 새로워졌다. 이제 조금은 알겠는 게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하신다. 중생이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형성되는 것이고, 성결이란 그의 역사로 인하여 내가 주를 더욱 닮아가는 것이다.
오전에는 에베소서를 읽으며 ‘그녀’를 생각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한 바 없다. 얼떨결에 문병을 갔고, 주의 이름으로 위로를 한다는 게 함께 에베소서를 읽고 그 내용을 더듬으며 주의 뜻을 바라는 게 되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오늘에 처한 이 모든 상황이 궁극적으로는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임종을 앞둔 그녀에게 이와 같이 말씀을 전한다는 게 가당키나 했을까?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나는 당시 목사고시를 두 번째 낙방하여 실의에 빠져 있었고, 그녀는 모든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갈 계획이었다. 그런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으로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 우리를 마주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2, 24).”
그렇게 오십 일을 아침마다 그녀를 만났고, 주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담담하였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말씀이 새롭게 다가온다는 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14).” 우리 안에 비로소 비추이는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들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시려고,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6).”
곧 각자 서로의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우리의 개별성은 계발되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신다.’ 곧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그러니까 ‘그의 뜻의 결정대로’ 우리들로 하여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에베소서를 읽다가 ‘그녀’를 생각하였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묵상할 수 있었다. 지내놓고도 믿기지 않는 게 있는 법이다. 참으로 절묘하게도 서로는 각자의 실의와 낙심에 빠져 있을 때였으니 누가 의도적으로 일을 꾸민다고 해서 그처럼 섬세할 수 있었을까? 새삼 마음이 뭉클하여 한참을 서성거리며 주를 찬송하였다. 남은 자의 삶은 명료하였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사는 날 동안 주가 맡기신 것들로 씨름하면서 ‘찬송하게 하시고 찬송이 되게 하시며,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오후께 딸애가 문자를 주어 졸업 동기가 자궁암 3기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이제 스물여덟, 참으로 눈부신 나이였다. 가르치는 중1 아이가 짜증 섞인 말투로 ‘아빠가 죽든가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하더라고, 아내는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저만치 역전에는 노인들 서너 명이 황혼을 등지고 모여앉아 구슬픈 곡조의 트럼펫을 연주하고 있었다. 옆에 조산원에서는 새로 아기가 태어났다. 늙은 노모들이 삼삼오오 복도를 휘청거리며 옆에 치료원을 드나들었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모두가 개별적이어서 눈물겨웠다.
모든 게 마치 별개의 것인 양 연관성을 찾기 힘들지만, 하나님은 이 모두를 주관하시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며,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는다. 하지만 모든 사연은 ‘하나님과 나의 문제다.’ 모든 건 계시다. 보이시는 주의 뜻을 바르게 읽고 분별하는 게 성도의 특권이었다. 그러므로 내 이야기가 아닌 데서도 우린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균형감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1).” 주 없는 삶은 허망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 차이는 뚜렷하여서 전에처럼 서글프지도 혹은 서럽지도 않다. 사는 날 동안 지긋지긋하게 돈돈거리지만,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잠 13:8).” 그것으로 사는 데 속전을 삼을 수는 있겠으나 그래서 주를 더디 찾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내가 누릴 소원의 값을 제시한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잠 13:12).” 무엇을 소원하고 사는지, 돌아보게 한다. 하여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19).’ 소박하였던 본래의 소원은 과장되고 집착되어 서로를 끝 간 데 없이 몰고 간다.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기를 바라던 마음이 ‘남들처럼’ 공부 공부하면서 아이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사춘기여서 문제가 아니라, 그 부모가 여전히 머물고 있는 사춘기 때문이었다.
소원을 무엇에 둘 것인가? 우리의 소원은 생명나무라. 가정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이제 기도할 줄 모르는 아이와 그 가정을 위해 도고하였다. 단지 저가 우리 인생의 속전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하시는 주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거기엔 나를 바로 쳐야하는 사명도 있다. “내 양을 치라(16).” 그러므로 “내 양을 먹이라(17).”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말이다. 이 사명은 모두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15).” 누구보다 주를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표현은 양을 먹이는 거였다. 말씀으로, 주의 사랑으로, 그 꼴을 얻는 일이어서 사는 게 곧 사명이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9).”
내 마음에 두시는 소원이 생명나무를 얻게 하였다. 비록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도모하여 일을 확장하시는 건 주님이시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
아이들을 대하는 일에서부터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을 본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이게 어찌 감사할 일인가? 싶어 마음이 어렵더라도, 비록 현실은 감사할거리가 아닌 것 같으나 이 모두를 도모하시는 이가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신뢰함으로 가능하였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그리하여서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73:21).” 남들과 견줄 때 어떤 서러움이 또 원망이 내 안에 들어차지만,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2-23).” 나로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고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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