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전봉석 2017. 4. 14. 07:51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잠언 14:2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하나님이 싫은 것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기가 싫고 그러므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느니 착하게 살고 봉사를 하고 나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괜찮은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 즉 하나님께 나의 주도권을 내어놓느니, 교회에 헌신하고 남을 위해 희생을 하며 자신의 수고와 애씀을 다한다. 거기까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데까지, 내가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는 선에까지 도달하여 하나님을 거절한다.

 

왜 아이와 통화를 하면서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나른한 오후, 아이와 통화를 하면서 나의 평온은 깨졌다. 선생님, 저기요… 하면서 이어지는 아이의 근황을 듣다 가슴이 철렁하였다. 이런저런 증상이 공황장애 전조였다. 얼마 전부터 예기불안이 가중되고 있었고, 급기야 사람을 피하고 새로운 일을 주저하며, 막히고 밀폐된 곳에서 몸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거 원, 나 때문인가? 싶을 정도로 왜 또 가까이 지내던 아이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우리의 대화는 길어졌고 나는 안타까움으로 가장 빨리, 가장 진실 되게 주 앞에서 두 손 들기를 바라였다. 다른 녀석은 그래서 모 기독교 동아리에 들었다. 매일 모여 기도를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는 걸 방어하듯 말하였다. 주일을 지켜야지, 그런 일을 하면 안 되지… 하고 말할 때, 본인은 매일 아침 새벽예배를 가고 무슨 세미나에 참석하였으며 어느 찬양집회에도 다닌다는 소릴 하였다. 한데 이 아이도 그와 유사한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으며, 나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항변하였다.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우리의 공통점은 고집이 세다. 왜 내 주변엔 그런 애들(?)만 모이나 싶었더니 내가 그런 것이다. 정말이지 나와 닮은 아이들이 나를 유난히 따르고 좋아했던 것이고, 저들의 고집과 견고한 자아는 내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서로가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마치 전염되듯이 그 걷는 길도 닮아가나? 그래서 더 속상하였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부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고집은 동일하여서 뭐라 한들 듣질 않는다.

 

오늘 잠언의 말씀은 정직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즉 주를 경외함이 없는 정직은 무효다. 바르게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경외함이다. 경외감 없이 온전한 친밀감은 없다. 거짓 정직은 자기 영혼을 모호하게 할 뿐이다. 이 정도면 됐지 뭐? 싶은, 그래서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경멸이란 설마, 하는 것이다. 깔보고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꼭 그래야 돼? 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난 이러고 잘 살고 있는데 뭐! 싶은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시들해진다. 아니면 격하게 좋아하던가! 이 둘의 공통점은 ‘자기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자신에 대한 주도권을 놓치지만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1).” 이를 용인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정작 성경을 알면 알수록 성경대로 살 수 없는 데서 절망감을 느낀다. 가령 산상수훈을 묵상하면 할수록 나는 그와 같이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애통하지도 않으며 긍휼을 행하지도 못한다는 데서 가슴이 철렁한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그래지지 않는 나를 마주하면서 나는 속수무책이다. 두 손 들고 주 앞에 온다는 건 내가 나를 도저히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좀 해볼 수 있을 것 같을 땐 늘 적당한 거리를 둔다.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는 게 싫은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 주가 아니면 나는 주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나는 하나님을 바랄 수가 없다.

 

통화가 끝나고 한참을 시무룩하게 있었다. 왜 다들 그럴까? 싶게, 참 어려워들 보였다. 그러다 한편으론 그래서 다행이다 싶기도 한 것이, 것도 모르고 룰루랄라 정신없이 사는 삶이 널렸기 때문이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눈물이 핑, 돌았다. 때론 사는 게 너무 고단해서 힘에 부친다. 중2 아이가 왔다. 어르고 달래다 결국 보내기로 했던 원고는 포기하였다. 당최 의욕이 없다. 뭐라 한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마음이 더 까부라져 어려웠다.

 

한 시간도 채 못하고 아이와 남은 시간에 탁구를 쳤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진짜 열심히 쳤다. 아이보다 더 아이처럼 구니까 것도 위로가 되었다. 주일 날 올래? 나의 뜬금없는 말에 아이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몇 시죠? 하고 물었다. 그러게, 내게 왜 이런 게 위로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주일 날 올 거처럼 하고 돌아가는 아이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맞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별 수 없는 일이다. 교회는 다녀도,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지만, 혹은 회심한 경험을 갖고 있어도 주도권을 놓지 않는 한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산상수훈에 따라 사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속을 끓이다가도 이게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데서 안도하였다. 끝내 거절하는 아이와 끝내 거절하는 것을 꺾으시는 하나님과의 싸움이다. 그럼 뭐, 그 승패는 빤한 것이지만 그러는 동안 아이가 짊어지고 걸어야 할 그 짧지 않은 세월이 안타까웠다. 고집 부리는 만큼은 먼 길을 도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그걸 알려주기 위해 안달이 나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애쓰면서 사람을 사랑할 필요가 없는데, 그 수고와 애씀이 결국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이제 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어느 것도 주의 것이 아닌 게 없다. 또한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이와 같은 주권이 나의 하나님께 있음을 감사한다. 내가 내 것이 아닌 데 따른 안도와 고마움을 어찌 말로다 설명해줄 수 있을까? 내가 책임져야 할 건 내가 아니다. 나를 이 자리에 두신 이가 나를 통로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집중한다. 내 책임은 그 책임을 주께 맡기지 않은 책임이다. 내 책임은 그 책임을 주께 맡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내 안에 이는 여러 소요에 대하여는 가름할 게 없다. 나도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내 것이 아닌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그와 같은 사실에 감사하였다. 같이 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안 믿는 아이들을 위해 그 가정을 위해 도고하였다. 그저 한 번 입을 열어 아뢰는 것 같지만, 그러기까지 우리 안에서 볶이고 쓸려 마음이 너덜거리기까지 하나님은 생각을 두신다.

 

도대체 쟤 때문에 왜? 그깟 일 때문에 왜 우리가? 하는 어떤 억울함마저 든다. 그럼에도 그래서 더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거였다.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고, 내 안에 머무는 이상한 기운을 견딜 수 없어 주님께 토로하는 것, 내가 아는 기도란 그런 거였다.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자꾸 신경이 쓰여서, 손끝에 난 거스러미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고 해도 자꾸 거슬리는 것이다. 별 것도 아닌, 고작 생인손 같은 게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주님! 하고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 눈물이 핑, 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 몸도 마음도 모두 주의 것이었다. 나는 죽겠다 죽겠다 하는 것 같은데, 곁에서 누가 보고는 얼굴이 참 평화롭단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더니 그게 실은 성령의 것이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을 뵈옵고 그 얼굴에 광채가 나는 걸 그 자신만 모르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꾸민다고 꾸며지는 게 아니었다.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우리에겐 견고한 의뢰가 있다. 자녀들과 곁에 두신 모든 이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27).” 내가 아이를 생각함으로 안달이 나지만 그로 인해 주 앞에 간절할 수 있는 거였다. 안타깝고 마음이 쓰여 견딜 수가 없다가도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은 것은 주가 저를 돌보시는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읊조린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주님의 마음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