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잠언 30:32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편 90:17
한 주가 뚝딱 갔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으면서 토요일은 항상 헐렁하다. 아내가 도시락을 들고 나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였다. 우리 곁에 두시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아이들이 올 거 같지 않아서 소래포구나 갈까 궁리하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이 두 시가 다 돼 아이 둘이서 왔다. ‘해양영토 글짓기 대회’ 원고 초안을 잡아주고, <콩> 영화를 보여주었다. 마침 이웃하고 있는 분이 도넛을 주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진통제를 먹은 게 속을 울렁거리게 하여 혼났다.
월요일에 오겠다고 했던 아이가 갑자기 자궁근종수술을 하는 바람에 오지 못한다고 연락을 하였다. 같이 친구 셋이 오기로 했는데 저들이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한다나. 같이 다니는 교회 친구들인데, 다들 구구한 사연들이 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가장 먼저 좋은 직장에 취직할 줄 알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자세히 묻지 않았다. 평소에 말이 화려하여서 뒷심이 적은 경우였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특별한 위로가 있음을 묵상하였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그리 더하실 거면 그리 더하실 것이다. 내가 애써 궁리하고 보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위로하게 하시는 이가 위로로 다가오신다.
말에 휘둘릴 때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스스로 높은 체한 까닭이다. 안다고 여기는 마음이 늘 화근이다. 미련함이란 이를 자신만 모른다. 그럴 땐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말을 멈추게 해야 한다. 집요하게 끌고 가야 할 말이 있고 어느 시점에서 놓아두어야 할 말도 있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잠 30:32).” 악한 일을 도모한다 함은 나를 드러내어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그러느니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손이 귀하다. 마음은 늘 저 혼자 앞서기 마련이니까 내버려두자. 아이들이 와서 아이들을 위한, 손의 역할이 당연하였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7).” 말씀을 내 삶에 두고 투과하면 그 광선이 내부를 통과하면서 액체처럼 스민다. 먼저 말이 앞서지 않기를,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선입견으로 말을 주도할 수 없다.
듣고 되새겨 그 의미를 말씀 앞에 놓아두는 일이 훈련돼야 한다. 투과적인 경청이다. 커튼을 걷고 창을 열어야 바람이 들어오는 법이다. 이때 있는 그대로 다 여겨듣다가는 낭패다. 감당이 안 되는 말들로 내가 앓는다. 그럴 거 없다. 정작 말의 주인은 지나가고 난 뒤이다. 더는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벧후 2:13).”
그런 자들의 특징은,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17-18).” 먼저 물 없는 샘 같다. 그럴듯하나 정작 있을 게 없다. 또한 광풍에 밀려오는 안개 같다. 요란하고 화려하여서 자칫 그 흐름에 휩쓸릴 수 있다. 저들은 허탄한 자랑을 토해낸다. 그것은 그릇되게 행하기 때문이다. 본래 말이란 자신을 우선 두둔하는 데 능하다. 곧 정욕의 유혹이 뚜렷하다. 말이 많으면 별 수 없는 것이다.
정작 두려운 건 그 다음의 말씀이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20-21).”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더 좋았을 이도 있는 것이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행여 내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누구를 대하지 않기를, 설령 그렇다 해도 주의 사랑으로 인내와 온화함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시기를. 두려운 일이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행여 내가 누구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저에게 주의 이름을 그릇되게 증거 하는 건 아닐까, 나의 미련함이 말로만 설레발치는 게 아닌지.
나에 대한 아이의 화려한 수사(修辭)가 공연히 나를 어렵게 하였다. 누구에게 좋게 여겨진다는 건 그만큼 두려운 일이기도 한 것이다. ‘오래 참으사’ 오늘의 내가 있는 거였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나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이었다. 그게 안 되니까, 나는 자꾸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때에 이어서 읽은 말씀이 다음과 같이 알게 하셨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3-4).” 내가 전하는, 말하는 데 따른 이유와 목적을 재조명해주시는 것 같았다. 전함은 사귐을 전제로 하고 사귐은 누림을 전제로 한다. 누림은 그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서로 죄를 범하지 않게, 범하여도 주께서 대언자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2:1).”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까닭은 저가 나의 대언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나의 모든 걸 지고 죽었다 살아나신 이가 오늘도 날 위해 간구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러므로 내가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무엇이 되신 그분을 저에게 소개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성도로 살아간다는 일은 그런 거였다. 누구라도 대제사장이 되었다. 우리의 허물을 주께 고하는 게 사명이다. 실은 주가 다 하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주가 나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구를 위해 간구하는 게 일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히 3:22).” 여전히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여 기도 응답을 운운하며 현상을 보는데, 모든 기도는 드려짐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를 알기까지 때론 오래 시일이 걸리는 것뿐이다.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4).” 우리의 기도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내 안에서 벌써 다 이루어진 기도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2:3).” 나는 이 말씀을 그리 이해하였다. 기도하지 못하는 건 바라는 걸 다른 데서 요구하기 때문이고, 기도하여도 얻지 못했다고 하는 건 주신 것을 다른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하고 주께서 주시는 원리는 이미 계명으로 주신 바 되었다. 왜 모를까? 어둠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고,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11).”
세상에 있는 것으로 견주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6).” 그러나 우린 다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바로 그 영원에 대하여 서로가 가늠해보다 어지러웠다. 아이와 문자를 하다 당장에 연연해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한계로 힘에 부쳤다. 내 몸을 어쩌지 못할 때도 그 부질없음 앞에서 서글펐다.
그러므로 믿고 말씀대로 사랑하는 일밖에 달리 더 좋은 수가 없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3:23).” 누구를 생각하게 하시면 저를 위해 기도하면 되고, 어디가 아프거나 무엇으로 힘들면 그것으로 주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될 일이다. 우리의 형편은 날마다 염장으로 뒤채지만, 결장 고운 소금으로 주의 맛을 내기까지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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