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언 1:32-33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시편 91:14-16
늘 다짐하듯 기도하는 일이 있다. 주의 이름으로 아이를 사랑하되 아이로 인해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저를 생각함은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저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나는 저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는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원리와도 같다. 내 안에 주의 영이 계심으로 주는 나를 사랑하신다. 주가 저를 사랑하심으로 나도 저를 사랑한다. 때론, 사랑하기 싫어도 사랑한다.
모처럼 큰애도 남아 같이 탁구를 쳤다. 그게 뭐라고 고맙기도 하였다. 오기로 했던 누구누구를 떠올리며 서운하였다가 서러워했다. 뭘 어떻게 해야 아이를 교회로, 하나님 앞으로 오게 할 수 있을까? 저주가 아니라, 나는 그러기 위해 아이가 망가졌으면 좋겠다. 더는 자기 아집을 들어 저울질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 일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보다 복이다. 그것으로써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난다면 말이다. 도무지 그럴 조짐도 없이 모든 게 술술 잘 풀리는 것, 나는 감히 이를 ‘둘째 사망’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딸애는 남아 방송을 들어야 했다. 다다음 주에 딸애 선교단체에서 보내주는 가족여행 일정이 있다. 내가 같이 가면 좋겠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 오대산으로 갈 수 있는 차편과 여러 경로를 찾아보다 우울해졌다. 같이 가면 되잖아! 하는 아내의 퉁명스런 말이 서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그러게 말이다. 공부들을 끝내고 같이 소래포구까지 산책을 가자고 하였다. 역시나 사람들이 가득했다. 젓갈을 파는 해변가는 특히 더했다.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인데, 그나마 가장 덜 분비는 곳으로 나와 숨을 돌렸다.
나의 이런저런 면모에 대해서는 이제 그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우울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그것으로 인한 불편함이 있지만 엄연히 그것으로 얻는 유익도 있다. 내가 주를 더욱 바라고 구하는 일에 있어 나의 나 된 것보다 좋은 여건은 없다. 이를 병적이라 하면 나는 기꺼이 나의 병적인 면을 사랑한다. 내게 두시는 어려움으로 힘겹다가도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하여는 복에 복을 더하신 것으로 안다.
종종 내가 아이들에 대하며 차마 대놓고 그런 기도를 드리지는 않지만 주께 돌아올 수 있다면 실패와 좌절이 어느 은혜보다도 값지고 소중하다는 걸 안다. 끝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서 홀연히 부르심을 당할 때,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나는 이 말씀이 가장 두렵다. 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낫다는 말을 나는 그리 이해한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데 소망이 있는 것이다. 말씀의 경고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내일을 붙들고 어제를 딛는 게 오늘의 지혜다. 오늘은 오늘로써 족한 은혜다. 다음에요, 하는 미룸이 저주다. 설마요, 하는 안일이 미련함이다. 다 그렇죠, 하는 안이함이 거만함이다. 내가 뭐? 하는 반감이 자기 의다. 나는 그래서 같은 말이 반복되는 말씀을 사랑한다. 반복되는 하루하루 같지만 결코 매순간이 다른 것처럼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경우는 없다. 별 수 없다, 살아봐야 알겠다면 기어이 광야 40년을 돌아야지. 도는 날 동안 죽고 또 죽어서 모든 헛됨이 죽기까지 죽어나야지.
특히 노인들이 가득한 거리마다 술추렴이 한창이었고, 현란한 가요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댔다. 정처 없는 영혼들의 푸닥거리 같았다. 삼삼오오 모여 불콰한 얼굴로 누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내 나이가 어때서, 악을 쓰며 억지를 부리듯 목을 비틀었다. 요란한 음악소리에, 사람들이 목청껏 지껄여대는 말소리에, 선거철 방송차량까지 겹쳐서 이건 아주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모르겠다. 내겐 그러했다. 그리하여 눈물겨웠다.
이를 이렇게 들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누가 들으면 내가 너무 발칙한 것일까? 흥에 겨운 저들을 내가 뭔데 이러나 싶기도 하고.
마땅히 바랄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게 하시기를. 다만 내게 두시는 믿음의 분량대로 주를 바라고 구하게 하시기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전쟁 위기를 부추기고 일촉즉발의 불안을 야기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흥에 겨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부디 주만 바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 26:13).” 숱한 주가 도처에 널렸다. 즐거움이고 행복이고, 돈이고 출세고, 꿈이고 낭만인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그와 같은 세상에서도,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대하 6:30).”
그러므로 우리의 퇴행을 불쌍히 여기시고 오직 말씀만을 의지하여 주를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오늘 잠언은 그와 같은 직언이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2-33).” 세상은 요지경이라 해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겔 33:4).”
다들 혈안이 돼 있는 일에 대하여 아무리 뭐라 한들 누가 듣기나 할까. 이를 안타까워할 수 있는 나를 위한 교훈이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전히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남들은 다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해도 이를 안타깝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아이를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못 견뎌하는 마음이 이를 증명한다. 내가 대체 왜 얘 때문에 쩔쩔매야 하는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1).” 문득 생각이 든 것은 내가 건강하여 아무렇지 않았다면 과연 그 즐거운(!) 광경을 이처럼 아프게만 느낄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지, 하는 안일함이 우리로 하여금 소돔과 고모라에 살게 한다. 누군들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그곳으로 들어갔겠나!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말씀을 증거하며, 그러므로 우리 안에 두시는 어떤 두려움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남들은 다 괜찮다고 할 때 안 괜찮은 사실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말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모든 일들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그러느라 깜빡 잊은 게 있기 때문이다. 등하시하고 어느 순간에는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그 무엇, 우리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였다.
우리의 살 길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온통 주께 향한 마음으로, 사랑이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4-16).” 그러므로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나는 가끔 주의 책망이 우리 삶에 여실히 드러나기를 기도한다. 주를 외면하는 아이들이 따끔하게 혼쭐이 나기를 바란다. 악담이 아니라 충심으로 사랑해서 하는 말이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29-30).” 아!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31).”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다. 그리하여 주만 바라는 마음이 복이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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