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잠언 2:20-21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편 92:12-15
내가 찾아가는 길로는 어림없을 거였다. ‘지혜가 나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셔야 한다.’ 별 거 아닌 일에 짜증이 올라와 혼났다. 케케묵은 감정들이 기다렸다는 듯 부유하는 게 느껴졌다. ‘지혜는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한다.’ 왜 날마다 내가 죽어야 하는지 알겠다. 여전하여서 여전함으로 나를 휘어잡는 게 늘 있었다. 날이 너무 좋아서 우울감도 더했다. 낚시라도 좀 가고 싶은데 자꾸 어디가 아팠다. 형편은 여의치 않았고 더는 만만한 친구도 없었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으리라.’ 있는 그대로, 두신 상황 가운데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리 두시는 이를 신뢰하는 것. 하나부터 열까지 마땅치 않은데, 그래서 짜증이 또 화가 올라오는데도, 묵묵함이란 주어진 생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 짐작하여서 말씀을 끌어당겨 마음을 더했다. 별 수 없을 땐 별 수 없는 대로도 그 시간을 다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전화를 하였다. 좀 어떤지, 여의치 않으면 여의치 않은 대로 통화라도 할까 하였다. 우리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이는 수긍도 외면도 아닌 모호한 대답만 하였다. 한 녀석에겐 문자를 넣었다. 4월말까지 술집에서 일하는 게 끝났는지 물었다. 주일을 지켜야지, 이제 같이 믿음 생활하자, 하고 말했다. 앞으로 주일 날 오겠다는 말에 새삼 기운이 났다. 옆 사무실 노인에게 냉 보이차를 한 병 가져다주었다. 빈 사무실을 지키듯 나는 텅 빈 공간 안에 덩그러니 혼자였다. ‘완전한 자는 땅에 남으리라.’ 나는 이 말씀을 두신 바 그 형편과 사정 가운데서, 그게 어떠하든 주를 바라는 자리어서 완전함이라 생각한다.
온유함이란 그런 것이다. 어떠하든 주를 신뢰함으로 참고 또 견디는 것, 비록 내 생각과 다르고 바라던 게 아니라 속상해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그 땅은 어떤 것인가?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라.’ 곧 그 뜰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왜?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곧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그러므로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 이를 나는,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되뇐다.
구구절절 어디가 아프고 뭐가 힘들고 왜 또 그러저러한지 열거하지 않아도, 이 땅에서의 생이란 내남 없다. 누군들 고달프지 않은 인생이 있으랴. 그래서 저마다 자기 위로를 찾아 자존감을 운운하고, 자아실현을 모토로 자아성취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세상의 지론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으로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데 있다. 아이와 통화하면서 왜 그처럼 힘에 겨워 약물에 의존하고 술을 찾고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못 견디겠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갇힌 자기 아집과 어떤 서러움이 또 화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시대는 과장된 자아의 시대다. 말세의 징표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2).” 어느 것 하나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다.
그때도 말세였는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말세라니! 이내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의 때다. 자기를 사랑함이 도를 넘어섰다.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밑줄을 긋고 한참을 머물렀다. ‘지나쳐’ 뭐든 지나쳐서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못하게 한다. 자전거도 자전거의 용도 이상으로 지나쳐 그 값에 허리가 휜다. 모든 생필품이 그 쓰임새에서 지나쳐 마치 저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게 됐다. 명품 가방을 운운할 것도 없다. 모든 물건을 위해 생이 소진되는 셈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그 안에 모시지 못하고 교훈에 거하지 않는다. 소리 내어 말씀을 읽다가 내가 왜 쩔쩔매는지 알 것 같았다. 지나치게 바란다. 그래도 남들처럼 살아야 할 것 같은 추구심이 강한 것이다. 아이에게 장난감을 하나 사줘도, 이제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발에 명품 운동화를 신겨야겠고, 학교에 등교하는 어린 것의 등엔 수십만 원 하는 명품 가방이 걸려야 직성이 풀린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 하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려 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자기 기준, 자기 판단이 과장된 자아를 형성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결코 내가 스스로 나를 깨끗하게도 정직하게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누구보다 열등의식이 많고 억눌린 자아가 왜곡되어 나를 과장하려 드는 걸 잘 안다.
기어이 자기사랑의 폐단이 주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한다. 바울 사도는 이를 ‘고통하는 때’라고 명명하였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딤후 3:1).” 이로써 도가 지나쳐 자기를 사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나 극진한지 먹이고 입히고 신기는 모든 게 허리를 휘게 한다. 너무 과하다. 몸을 돌보는 일에서도 이에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벗은 몸을 자랑하고 선정적인 포즈에 도취한다. 먹는 일에 혈안이 되어 한 끼 식사를 위해 영혼까지 탈탈 턴다. 그야말로 의식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면서 자기 사랑을 운운하는 꼴이라니!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그러지 못해 안달이 나는 거 아닌가?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요구는 참 뜬금없으시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이런 말을 누가 듣겠으며 설령 듣는다 해도 얼마나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겠는가! 기껏 잘 알겠다가도 별 것도 아닌 일에 불쑥 화를 내면서 켜켜이 내 안에 쌓였던 피해의식과 열등감과 자괴감이 한데 버무려져 고약한 악취를 풍겼던 것이다.
주님, 우리는 못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자. 나는 아이와 통화하면서 말하였다. 뭘 어쩌라고 아이를 훈계하기에는 내가 더 빌빌거리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나를 신뢰해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의뢰할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상황과 상황은 오직 주만이 감당하여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같이 대화하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일렀다. 모르겠다. 아이가 내 말에 얼마나 호응을 하는지 또는 성가셔하는지. 다만 나는 내가 못 견디겠어서 주의 도우심을 바랐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한때 나는 바울의 고백이 너무 과장된 것 같았다. 뭐 또 그렇기까지야, 하고 그저 수사어구로 읽곤 했다. 한데 그게 나였다. 나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닌가! 보혈의 십자가가 아니면 누가 나를 정케 할 수 있을까?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이 결코 인위적으로 우리의 수긍과 호응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1).”
주가 아니시면 나는 살 수가 없다. 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인생에 대하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곧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144:3).” 그리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아! 그러므로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해야 하였다. 같잖은 나를 끔찍이 사랑하듯이 말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 19:19).” 다시 말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이라도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주를 경외한다는 것이고, 주를 경외한다는 건 주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것이며, 주를 신뢰한다는 건 주를 경배한다는 것이고, 주를 경배한다는 건 주님을 존경한다는 것이며, 주님을 존경한다는 건 주께 감사한다는 것이고, 주님께 감사한다는 건 우리 주의 선하심을 안다는 것이다. 그 앎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순종만이 사랑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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