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전봉석 2017. 5. 3. 07:35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3:6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시편 93:3-4

 

 

 

이겨야 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 또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 그러므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 이에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26).” 그리하여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하여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이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

 

모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귀 있는 자로 나는 주께서 나에게 이김을 또한 허락하실 것을 신뢰하였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힐끔, 시간을 보고 아이가 올까? 기대하였다. 이겨내야 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우리 안의 회의와 갈등도 무찌르고 이겨내야 할 거였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훨씬 타당한 논리를 가졌는지!

 

오전 내내 기다렸지만 아이는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할까, 하다 그냥 두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는 자세로 같이 만나자.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신 이 모든, 고통까지도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하시는가, 풀어보자. 전날에 통화하면서 나는 일부러 복선을 깔았다. 미리 그 선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내가 저를 상담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이는 매주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는다고 하였다. 이런 말을 싫어할 거란 걸 알면서도, 그런데도 오면 같이 해볼 만한 거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더 다가설 문제가 아닐 거였다.

 

범사에 주를 의뢰하는 것, ‘주께서 그리하심’을 인정할 수 있다면 모든 얽히고설킨 길은 단순해진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기 때문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다만 그러는 데 있어, 우리에겐 의지적으로 바라고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잘 모르겠지만, 심지어 믿어지지 않더라도, 주님! 하고 그 도움의 대상을 바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그럴 테니 따라와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도 그러기까지 우리를 참고 기다리신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인내하심의 표본이다.

 

그렇지 않고 마냥 들어주고 있는 그대로 치대는 걸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건 꼭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이다. 저에게도 그 정도 대상일 뿐이다. 그럴 수 있다면 꼭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 해도 성경의 그, 말씀으로의 하나님 말고 두루 보편화된 ‘하느님’ 정도면 충분한 것이다. 결코 나는 저에게 사는데 유익한 정도의 하나님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다시 또 시간을 두기.

 

아이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고 여러 번 망설이다 그냥 두었다. 기도로 하자. 며칠이 될지, 혹은 더 긴 시간이 될지 모르겠으나 다시 또 시간을 둬야 할 거 같았다. 그러는 데 따른, 모든 건 이겨야 할 일이다. 마침 새로 읽기 시작한 계시록 가운데 ‘이기는 자’에 대한 말씀이 유난히 큰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내 마음을 아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하신다. 곧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

 

내가 누구를 또 어떤 일을 마주할 때,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일 말고 다른 더 좋은 방법이 또 있겠나? 내가 나서서 누굴 상담하고 어쩌고 할 위인이 못된다. 하나님 말고 내겐 할 말이 없다. 감히 주를 운운하며 내 판단과 기준을 앞세울 수 없다. 어쩌면 그게 사는 날 동안 신념이 되고 나름의 이로운 확신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헛된 것으로 만족을 얻지 말아야 한다.

 

누구를 대함에 있어 특히 저의 아픔을 같이 나누어야 하는 일이라면, 기본 전제가 분명하였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을 주께 아뢴다. 주는 위대하심을 신뢰하도록 한다. 적개심을 거두고 어떤 문제의 원인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자백과 용서를 구한다. 스스로 자위하려들지 말고, 다 잘 될 거야! 하는 헛된 망상을 주의한다. ‘잘 되고 안 되고’가 우리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일, 결국 이 모든 게 주의 선하심이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누구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나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나에게 날이 풀렸다는 건 내 몸의 통증이 한층 구체화 됐다는 소리다. 다리는 저리고 시렸다.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와 허벅지가 아프고, 일어서면 허리가 아프고, 누우면 목이 아프고…. 아프고 아픈 일상에서 때론 그것이 너무 과중하여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통소염제를 먹으면 속이 울렁거려 자칫 위경련으로 오니 것도 어렵다. 나는 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주제라 나야말로 주님이 아니면 더는 푸념할 데도 없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시 93:3-4).” 오늘 아침 시편의 이 기도가 의미하는 함의적인 내용이 깊다. 어떤 어려움이 또는 즐거움이 크고, 그 큰 것은 더 큰 것으로 그 높이를 더한다. 그러나 주의 능력은 그 모든 ‘큰’ 이상의 크심을 알게 한다. 그것에 나에게 고통이라 해도 고통이 고통스러워서 원망이 또 화가 나를 덮으려고 하지만 그럴 때면 주가 더하시는 주의 크심이 나에게 더한다.

 

우리를 엄습하는 직접적인 어려움이든 간접적인 고통스러움이든, 제아무리 큰 물이 소리를 높인들, 나의 주님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시다. 곧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시 93:1).” 내가 잘 견디는 게 아니라 주가 계심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주가 다스리신다.

 

그것이 나의 고통이든 우리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나름의 고난과 역경과 비루한 환경이든,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2).” 무엇도 주의 보좌를 위협할 수 없다. 때론 나의 고통이 짜증이 되고 불안이 되고 어떤 두려움으로 나를 휘감을 때도 있지만, 그래서 나의 혐오스러운 자기애를 마주한다. 고상을 떨며 마치 선을 이루고 사는 줄 알았던 위선과 맞닥뜨린다. 그리하여 주 없이는 살 수가 없음을 알게 한다.

 

오후께 중2 아이가 왔다. 새로 여자 아이 둘이 같이 하게 됐다. 주일에도 나올 수 있기를 여러 날 전부터 기도하고 있었다. 문득, 사랑이 고픈 것이다. 허물없이 웃는 아이의 모습에서 어떤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쩌면 사랑할 줄 모르게 하였다. 아침에 오기로 했던 아이도 그런 것이다. 구구한 말이 많지만 한 마디로 하면 존중받고 싶은데, 사랑받고 싶은데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함몰된 것이다.

 

글쎄, 아직 낯설고 어색한 사이인데 아이가 ‘너무’ 허물없이 활짝 웃는 모습에서 나는 우리의 근원적인 구애(求愛)를 느꼈다. 두 아이는 서로 경쟁하듯 깔깔거리며 좋아라 했다. 앞서 다니던 사내 녀석이 머쓱해할 정도였다.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참 밝고 싱그러운 모습인데, 내가 병들었나? 어째 느껴지는 느낌이 안쓰러움으로 다가온 것일까? 아무튼 첫 만남이 나쁘지 않았다.

 

주가 하신다. 이 모든 걸 주가 하신다. 내가 하려 드는 것만 빼고 주가 다루신다. 기어이 내가 어찌 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 하는 동안에 수고와 애씀은 각오해야 한다. 주께 맡기자. 나의 책임은 그거였다. 나의 한 날의 고통까지도, 나는 다만 이겨내야 한다. 할 수 있는 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될 일이다. 그만큼만 맡기신다. 고통도 슬픔도 기쁨도 즐거움도,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가 하나님만으로 충만하시기 위해! 나는 이제 그리 이해하였다.

 

아직도 힘든지, 어디가 어떻게 아프고 힘든지, 왜 그런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간교한 뱀’은 여전히 우리 안에 부추기는 것이다. 세상은 이를 분석하여 평안을 우선으로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었다. 차라리 더하더라도 그래서 그 고통이 염려가 후회가 더 심하더라도, 그리하여 주를 바라보기를. 우리 안에 성령이 예수 안에서 충만하여지기까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그러므로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시 93:3-4).” 아무리 어떠어떠하다 해도,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