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전봉석 2017. 5. 4. 07:43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잠언 4:7-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편 94:18-19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이 움직였다. 뭘 할까? 하고 궁리하느니 어제했던 걸 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이 단순한 이치를 이제는 사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명료하고 분명한 진리가 모든 경우의 수를 일거에 정리하듯이 말이다. 사는 게 복잡한 이유는 나름 재고 따지고 더 나은 걸 바라는 데서 오는 피로감 때문이다. 점심 때 아내는 간단하게 도시락을 챙겨서 글방으로 왔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나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그렇게 듣는다. 한 무드장이의 태평한 너스레가 기억난다. 가난한 형편에도 아내는 열한 번째 아이를 임신하였다. 어느 날 10년째 수도원에서 묵언수행을 쌓고 나온 수도사가 그 사연을 듣고 물었다. 어려운 형편에 어찌 그 많은 아이를 키우려고 하시오? 그때 무드장이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십니까? 주시는 분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그러자 수도사는 샌들을 고쳐 신고 도로 수도원으로 들어갔다나.

 

진리가 왜 복잡한가? 복음이 왜 어려운가? 하루는 출근을 서둘며 옆에서 아침을 먹던 딸애가 물었다. 아침마다 뭘 그렇게… 글이 써져? 나는 즉답을 못하고 며칠 동안 그 말을 생각했다. 뭘 쓰려고 해서 쓰는 게 아니라, 아침이 돼서 묵상을 하고 묵상을 한 걸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냥, 여기서는 이 말보다 정직한 말이 없을 듯하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아침이 오고 하루가 지나가는 일처럼 그냥이다. 저는 내게 뭘 하나, 왜 하나, 묻지 않는다. 진리는 다만 진리일 따름이다.

 

지혜가 제일이다.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명철하다는 건 총명하여 사리에 밝음이다. 사리는 일의 이치다. 이치는 사물의 정당한 조리다. 곧 도리에 맞는 취지다.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이다. 이것은 우리말사전에 나와 있다. 이를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러한 우리의 품성으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저들로 알게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냄새가 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이를 정리하면,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 나는 그 이치에 따른다. 곧 오늘의 나에게 정당한 조리는 마땅히 행할 길이다. 그러므로 ‘그냥’과 ‘마땅히’는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를 신뢰함이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여기서는 ‘왜’가 아니라 ‘네’가 명료하다. 왜? 하면 또 숱한 경우의 수가 생긴다. 그러므로 ‘왜’는 ‘네’ 다음의 것이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왜’가 앞서면 ‘네’는 묘연하지만 ‘네’가 앞서면 ‘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왜 그걸 내게 묻습니까? 하는 무드장이의 의아함도 그래서다.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여기서 나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게 무얼까?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시 104:5).” 그리하게 하시는 이가 그리함으로 내 안에 함께 하시는 것이 그를 품은 것이어서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신다. 이를 알게 하신 이가 말이다. 뭘 할까? 어디라도 갈까? 하던 궁리가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스 기니스의 <르네상스>를 읽었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소리를 내어 또박또박 읽었다. 아내는 중3 과정, 아이들 가르칠 수학문제를 풀었다.

 

오후께 산책 겸 마트에 들러 찬거리를 몇 개 사들고 왔다. 해는 서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바람은 선선하니 일품이었다. 말 그대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다. 공휴일답게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산다는 일은 아무 염려도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염려를 모두 주께 맡기고 산다는 일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이 지당한 말씀으로 우리 삶의 중심을 삼는 일이 복이었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시는 이로다(시 33:15).” 그러므로 내 안에 이는 온갖 생각의 서러움을 어찌 모르실까? 때로는 나를 걸려 넘어뜨리기도 하는 몹쓸 마음과 상념과 엉뚱한 행동까지도 주는 굽어 살피신다. 이는 나를 혼내려는 게 아니라,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 17:8).” 나로 하여금 안전히 거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27:5).”

 

저녁 식사 후에 군에 있는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휴일이라 군 전화로 통화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일은 잘 지키는지, 말씀묵상은 놓지 않고 있는지, 기도생활은 꾸준한지, 이어지는 나의 질문은 고리타분하였으나 아이는 그때마다 그럼요, 네, 하는 대답으로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다음 주일에는 휴가를 나와서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에, 아내는 무얼 먹고 싶은지 물었다. 이런 것이구나! 내가 이런 것으로 기뻐한다는 게 신기하였다.

 

가끔은 내가 바라는 게 낯설고, 나로 하여금 기쁘게 하는 것이 신기하다. 아이와 통화가 끝나고 나는 괜히 뿌듯하고 감사하여 마음이 우쭐하기도 하였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전에 바라던 것이 이제는 안중에 없다. 필사적으로 좇고 의지하였던 것이 더는 대수롭지 않은 게 되었다. 누가 나를 어찌 생각하든, 오늘의 우리 형편이 어떠하든, 주일에 장볼 걸 생각해서 없는 살림에 계란도 못 사고 돌아온 아내는 아이가 좋아하는 불고기를 할까? 닭고기를 할까? 설레발을 떨었다.

 

아!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어느 순간 우리의 바람도 시선도 간절함도 주께 향하고 있었다. 애써 무엇을 그리 하려는 노력에서가 아니라 문득 그리 되어진 일에 놀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목회자가 되실 건가요? 목사고시 면접 때 면접관이 물었었다. 저마다 거창하고 멋진 답을 하였으나 나는 한 번도 ‘어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 순서가 되었을 때,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랬던 것 같다. 조금은 벌줌하고 싱거운 대답이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씀을 나는 그렇게 읽는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42-43).”

 

이는 나를 건사하는 일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인생인 것 같지만, 주께서 내게 맡기신 나이다. 때론 거칠고 힘든 몸으로 쩔쩔매면서도 이를 돌보는 건 주의 것이기 때문이고, 멋대로 굴 듯 잡히지 않는 마음이지만 이를 어르고 가는 일도 주를 향한 것이었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덴 나의 영혼도, 마음도, 몸도 주의 것이라! 이를 건사하고 다스리는 일도 포함되었다.

 

것도 결국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8-19).” 주의 것으로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시게 주께 내어드리는 일이 귀하였다. ‘왜?’가 아니라 ‘네!’로 사는 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러므로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24).”

 

‘묵묵히’라 함은 어제 했던 일을 하는 것, 어제 했던 일은 그제 했던 시간의 일이고, 앞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길로써 바울이 주를 신뢰하였던 길이며, 다윗도 그러했던 길이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시 37:18).”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을 그 길을 따라 가는 것.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시 94: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