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언 6:10-11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시편 96:6
게으른 자에 대하여 잠언의 말씀은 질감을 달리한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10:26).” 대책이 안서는 것이다. 저는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12:27).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까닭에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19:24).” 누구 탓을 할까?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22:13).” 그럴 수밖에 없는 핑계가 늘 있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26:13).” 결국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16).”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고집이란 심리적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는 최초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하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랬어, 하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선입관은 앞서 가진 고정관념을 말한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보폭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 하는 것이다. 이내 빈궁과 곤핍함이 강도와 군사 같이 임한다. 곤비함은 아무 것도 할 기력이 없을 정도로 지치고 고단한, 무기력증을 말한다.
일찍 눈을 떴다. 서둔 건 아닌데 설교원고도 오전 중에 마쳤다. 전날에 메모해두었던 것이 전혀 다른 내용이 될 때의 신비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주신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이끌린다? 목사가 되고 특히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누리는 만족감은 축복이 되었다. 때론 쓰기 싫고 전에 걸 가져다 어찌 얼버무리고 싶은 생각이, 늘 있다. 어떤 부담감 같은 게 숙제처럼 여겨지게도 하는 것이다. 몸이 좀 안 좋거나 마음이 어려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어제처럼 공휴일이면 괜히 더 그런다.
그럴 때면, 나는 단순하게도 다음 말씀을 되뇐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억지로’와는 좀 다른 느낌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이거라도 안 하면 내가 하는 게 무언가? 싶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 아내도 역시 아침에 한 아이를 보충으로 불러 수업을 해주고, 도시락을 싸들고 글방으로 왔다. 오늘도 나오셨어요? 하고 복도에서 마주친 이가 물었다. 저야 늘. 말을 해놓고 보니 이보다 소중한 게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일상의 소소한 ‘계속과 언제나’를 나타내는 부사 ‘늘’이 값진 거였다. 어느 글에서든 문체는 글 쓰는 이의 호흡으로 그 자체다. 여러 복선을 깔고 안긴문장은 안은문장에 이끌리지만, 문장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성분을 다함으로 안정적이다. 늘, 바로 이 ‘늘’이 갖는 은총에 대하여는 감사와 함께 책무도 따른다. 마치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의 거동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졸병계급을 달면 졸병처럼 굴고 장교계급을 달면 장교처럼 행동한다. 나폴레옹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있는 것 같지만 여기에 있음으로 나의 ‘늘’은 그 몫을 다하는 것이다. 의식한다는 건 믿음의 행위라는 말이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게 곧 그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이는 곧 책무가 되었다. 순종이 무엇인가 하면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게 나의 동의보다 앞서는 것을 순종이라 한다. 그럴 수 있는 건 그리하시는 이에 대한 경외다. 견고한 의뢰다.
일찍 일어나서 일찍 자는 것인지,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그리 되었다. 늦게까지 뭘 하는 것보다 일찍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묵상글을 쓰는 일이 마땅한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 그리 되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5-16).” 하는 말씀에 저절로 밑줄을 긋는다면 이해가 될까?
어딜 가고, 누굴 만나고, 무슨 일에 부산하고 하는 데서 놓여났다? 그럴 수 있는 데 따른 환경과 여건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만 더 좋은 걸 바랄 마음은 없다. 아내는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한 편 보고, 나는 누워서 책을 읽었다. 그럼 아내는 아이들 수학문제를 풀었고 나는 앉아서 노트를 하였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3-105).”
‘말씀으로 순종할 때 영․육․혼이 협력한다.’ 밥간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새벽 네 시, 잠이 달아났어도 당황스러울 게 없는 것이다. 나에겐 이제 말씀이 있고 이를 읽고 묵상 글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있다. 나의 생각은 언어화됨으로 정확한 음색을 갖는다. 무슨 소린지 알겠다. 막연하다가도 이를 문장으로 옮겨놓으면서 선명해진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와 같은 확신이 축복이다.
가령 이제는 이와 같은 말씀이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몸이 먼저 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나의 어떤 수고와 애씀에 의한 게 아니라 그리 되어진 어떤,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 하면 될까? 칼빈은 성도의 견인을 그리 표현하였다.
성령이 주도하신다. 우리의 혼과 영과 몸은 쪼개졌다. 나의 마음의 생각은 판단을 받는다. 어느 것도 주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게 없다. 그럴 때 나는 이제 당당하고 부끄러울 게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와 같이 부끄러움도 감추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질하고 못난, 어처구니없는 나의 나 됨에 대하여, 그것까지도 드려지는 것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그래서 더욱 주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말이다.
여섯 시가 다 돼 주일 날 먹을 음식들을 배달시키고 집으로 왔다.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군다고 아내는 종종 타박이다.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닌데 어찌 그리 여겨지는가 보다. 적당히 나이 들었다는 게 나는 좋다. 돈도 부족하고 몸도 여의치 않다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느린, 더딘 발걸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게 한층 더 많으니까 말이다. 올라갈 땐 못 본 꽃이 내려오면서는 보이더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그럴 때가 있으며 이럴 때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시 96:6).” 다른 모든 걸 다 내어줘야 한대도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하는 말씀 앞에 오래도록 멈춰 서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왜냐하면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을 하며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던 시절이 있었다(잠 6:12-14).
어떻게 좀 잘 살아보겠다고 하던 거였는데, 실은 그게 남들처럼 사는 거였다. 잘 먹고, 잘 입히고, 적당히 누리면서, 남들처럼! 고작 남들처럼 사는 걸 행복의 목표로 삼았던 때를 말한다. 그래서, 그런들,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인 것을, 그걸 위해 그처럼 죽기 살기로 구부러진 말을 하고, 눈짓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마음에 패역을 품고 살았다. 인정받고 싶어서 끊임없이 말을 덧대고 꾸미기 일쑤였고, 행여 누가 내 본심을 알까봐서 수시로 눈짓을 하며, 누가 나를 깔보기 전에 내가 먼저 손가락질 하고, 그와 같은 패역을 품는 것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된다고 여겼었다. 악으로 깡으로 사는 게 자랑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느 때보다 지금이 좋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일일이 오늘의 형편을 열거하자면 환멸이 또 구구한 궁색함이 덕지덕지하지만 그 모든 것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그들을 이기었나니.’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아멘이다. 내 안에 계신 이가 나를 짓누르는 어떤 무엇보다 크심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5).”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6).” 무엇보다 고상하고 소중한 값어치다. 설령 미쳤다 해도 나는 이와 같은 미침으로 주께 미치기를 바란다. 어쩌다 그리 된 것 같은 나의 우연을 사랑한다. 이는 우연과 우연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필연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딸애 밥을 차려주기 위해서도, 게으르지 않게 글방에 올라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서도, 축 쳐져서 뭘 하지? 하고 어슬렁거리지 않기 위해서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과 말씀을 묵상하여 이처럼 글로 쓰는 일은 나에게 유익하다. 자주 들쑤셔대는 마음과 하루를 고단하게 만드는 연약한 몸과 어쨌든 제약이 따르는 물질의 곤고함과 어려움과 외로움과 우울과 갈등과 답답함에 이르기까지 이제 모두 나에게는 무관한 것으로써 묵상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그러므로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시 96:1).” 다시 하루의 삶을 허락하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8).”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산다는 일은 모든 게 다 무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33:15).” 곧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96: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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