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
잠언 5:22-2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시편 95:1
일찍 눈을 떴다. 여느 날처럼 묵상을 하고 식사를 하고 글방으로 가는 길에 대통령선거 사전투표를 하였다. 징검다리 휴일이 널린 주간이라 그런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성경공부를 위해 아이가 오는 날이었다. 계시록을 읽고 있다 사장이 건너와 커피를 한 잔 대접했다. 아이와의 성경공부를 서둘러야 했다. 뒤이어 중2 아이들 수업이 있어서 같이 점심도 먹지 못하고 돌아갔다. 중2 아이들에게는 ‘영화논술’로 <청설>을 보여주었다. 바삐 움직이다 오후 4시가 돼서야 썰물이 밀려가듯 한가해졌다.
이 책을 먹으라.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9-11).” 하는 말씀이 내내 기억에 남았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여 그 의미를 되새졌다. 단순하게 이해해도 소리 내어 읽으며 그 의미를 묵상할 때는 ‘입에 꿀 같이 달다.’ 한데 이를 삶 가운데 실천하려면 ‘내 배에 쓰게 된다.’
말씀이 말씀으로만 있을 땐 좋다. 견딜만하고 그럴듯하다. 메모를 하여 적어두면 뿌듯하다. 정말 감사하고 귀하다. 그래서 이를 삶에 가져오면 내 안의 소요는 물론 실제 생활에서 부딪치는 바가 고로하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삶과 분리된 말씀은 용이하다. 그러나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괴롭다.
바벨론에 있던 에스겔도 그러했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겔 2:8-9).” 그것을 가져다 펴보면 실제의 적용은 다르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10).”
받아들이기가 여의치 않은 것이다. 주춤거리자 다시 말씀하신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뿐만 아니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3:1).” 가져다 내가 먹어야 하는 일과 이것으로 아이를 먹이는 일은 또 다르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2).” 오늘 내게 이루시는 게 그와 같다. 입을 벌리라 하여 벌리니 주께서 말씀을 먹이시는 것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
그것으로 다가 아니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4).” 곧 내 배에도 쓴데 하물며 누구더러 먹으라 하는 일이 어찌 수월할까?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그 뻗대고 서는 힘이 여간 아니다. 어쩔 땐 내가 저의 질문에 진이 빠질 정도이다. 관둬. 싫음 말고. 누가 너더러 억지로 하래? 하는 욕지기가 목울대를 칠 때도 있다. 먼저는 이를 도로 삼키는 일이 내 배에 쓰다. 대체 왜 이런 애랑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중2 아이들 수업을 끝내면서 한껏 자연스럽게, 그럼 주일 날 11시에 보자! 하고 인사를 했다. 한데 아이들은 뚱한 표정으로 일요일요? 하는 것이다. 이 무슨 반응인지 모르겠다. 틈이 날 때마다 글방이 교회인 까닭과 같이 예배하고 교제하는 데 따른 설명을 했었고, 다들 알아듣는 듯 고개까지 끄덕거리던 게 아니었나? 그런데 마치 내가 뭔가를 끼워 팔다 항변을 듣는 것처럼 일요일에 오라고요? 하는 뚱딴지같은 반응에 감정이 상하는 것이다. 관둬. 싫음 말고. 맘대로 해! 하는 짜증이 목젖까지 치미는 걸 도로 삼켰다.
와 보라. 빌립이 전하였을 때 그는 거기까지였다. 정작 오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강매하듯 혹은 마치 주일예배를 끼워 팔 듯 하면 되겠나? 싶은, 아이들이 돌아가고 펄이 드러나자 어떤 서글픔까지 바닥을 드러냈다. 내가 이러려고 저 아이들을 공들여 사랑하나? 싶어서 화도 나는 것 같았다. 내 입엔 단데 내 배엔 쓰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머쓱해진 마음에 공연히 환멸이 또 회의가 밀려들기도 하였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해도 요지부동 늘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아이나 기껏 여러 날을 공들여 수고하였다 싶었는데 퉁명스런 반응하며!
문득 드는 생각이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려니까 그런가? 그럼 생활을 말씀에 적용하는 건 어떤가? 이게 그러니까 같은 말 같지만 다르다. 주객이 전도된다는 말이 그런 것이다. 객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다. 주인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권력을 잡으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뻔뻔한 정치인이 그렇고, 지식을 휘두르는 교수가 그렇고, 사랑을 과다 복용하는 연인이 그렇고, 부모가 그렇고… 이 땅의 불균형은 ‘심히 미련함으로 혼미하다.’ 곧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결국은 별 수 없는 일인가?
저마다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 하시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그리 들린다. 괜히 남 이야기 하는 것처럼 굴 거 없다. 내 이야기다. 이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버리라. 먹었더니 입에서는 단데 배에서는 쓰다. 혼자서 말씀을 묵상하고 밑줄을 긋고 이를 글로 쓸 때는 그럴듯하니 근사하기까지 하다. 그러다 정작 배로 내려가면 소화를 시킬 수 없어 쓰다. 어쩌면 갈대 지팡이 때문은 아닐까?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겔 29:6).” 이 말씀으로 계시록 11장 1절을 읽었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갈대 지팡이’와 ‘지팡이 같은 갈대’의 차이를 묵상하였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2).” 뭔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 표현하기가 어렵다.
주객이 바뀐 세상이다. 서로는 알면서도 모른다. 모르는 게 아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느니 개돼지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원해서다. 알면서도 모르는 거다. 누구에게 두루마리를 먹인다는 일은 그래서 묘연하였다. 실은 저들도 안다.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산다. 사장은 이런저런 제 말을 주워 삼켰다. 어디 여행을 간다는 말과 언제든 콘도가 필요하면 말씀하시라는 접대용멘트까지 하면서, 더 다가서거나 다가오는 걸 경계한다. 그럴 거였다. 저도 안다. 다만 모르는 게 약이라 여길 뿐이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늘 그런 셈이다. 다 좋은데 하나님은 싫은 것이다. 아니 하나님도 좋은데 저가 나의 주인이라는 건 싫은 것이다. 은연중에 아이들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그릇됨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좋기는 한데 그러기는 싫은 것이다. 주객이 전도됐다는 말은 어쩌다 그리 된 현상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 두는, 보다 적극적인 거절이다. 저항인 셈이다. 죄의 속성이란 하나님만 아니면 된다.
성령으로 보이시는 세계가 아니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저항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저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리 여기게 된 우리가 이상해진 것이다. 세상에서는 개처럼 버는 게 훌륭하게 보인다. 정승처럼 쓰면 된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그러니 저 아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아이들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신 이것이 이상한 일이다. 아, 그래서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께 관한 올바른 지식은 순종에서 나온다.’ 아이가 그처럼 어려워하는 까닭이었다. 순종은 곧 예배다. 자발적으로 다다를 수 없는 지점이다. 성령으로만이 보이시는 것이다.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을 성령만이 통달하셨다.
내 안에 들고 일어나던 어떤 노여움 혹은 서러움에 대하여 나는 마땅히 여겼다. 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누굴 탓할까? 목사들이 더 부화뇌동하듯 정치에 휘둘리고, 당을 짓고, 권력의 시녀가 되어 십자가와 태극기를 한끝 차이로 만든 마당에, 세상의 조롱은 박해가 아니다. 저들의 외면과 거절이 부당한 게 아니다. 이를 마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교회마다 예배를 끼워 팔 듯하였다. 아이들의 표정은 그랬다. 마치 나의 친절에 대한 값을 요구하는 듯 뜨악한 표정으로 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혼자 쓸쓸히 오늘 시편의 말씀을 되뇐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설령 또 그런다, 그냥 그런 사람으로 취급당한다 해도 나는 이제 그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겔 3:5-6).”
내가 저랬고 저게 나였다! 퉁명스런 아이들의 반응이 낯설지 않았던 것도 그것이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해도 전혀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은, 기껏 친절을 더하고 주의 사랑으로 다가간다 해도, 그저 뜨악하니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저 표정 앞에서 나는 거울을 보는 듯하였다. 누구보다 내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저 날이 지고 바람이 불고 해가 뜨는 일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 같으나 그러는 동안 성령이 하실 거였다. 내게 그런 확신을 두시는 건 오늘의 나로 살게 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묵묵히 가자. 노여워하거나 실망할 거 없다. 정작 우리야말로 저들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함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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