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언 7:3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시편 97:3
아이아빠가 교회에는 가지 말란다고 아이엄마는 아내에게 문자를 하였다. 이번 주일부터는 오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정말 어려운 거구나, 그러니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새삼, 이 길이 맞나? 싶은 것이,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급 우울감이 밀려왔다. 아내는 어버이날을 앞두고 처가에 갔고 나는 글방에 남아 한 아이만 데리고 수업을 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나머지 네 아이는 왜 못 오는지 연락도 주지 않았다.
아이가 돌아가고 청소를 끝내자 한 주가 정리되었다. 모처럼 친구가 문자를 주어 어찌 지내는지, 내가 용인으로 예배를 인도하러 왔다며 꿈 이야기를 하였다. 먼저 간 동생이 묻힌 곳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그렇구나. 다음 주에 투표하고 들르겠다며 안부를 물었다. 꼬집어보니 생시였다는 말처럼, 내가 너무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나? 싶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거절에 따른 상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은 또 저 혼자 쩔쩔맸다. 그렇다고 아이를 강제로 부를 수 없고, 그러니 더는 상관없다는 듯이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어쩌면 내 안에도 ‘수용과 지지를 얻으려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라도 하나 그럴듯하면 좋겠는데, 혼자 온 아이는 삐딱하게 툴툴거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운동을 하는 큰 오빠에게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는 엄마에 대한 상실감이 더욱 어리광을 부리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내 안에서 이는 마음은 둘 중 하나를 강요하였다.
그냥 무관심하게 굴거나 아니면 더욱 원리와 원칙을 따져 까다로운 사람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나 혼자 환상에 빠지듯 ‘다 잘 될 거야’ 하면서 스스로 황홀경에 빠지거나. 거절에 따른 감정변화가 너무 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마음을 휘젓고 있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을 묵상하였다. 감옥이라도, 사람들로부터의 외면이든 멸시와 천대든,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시 69:7).” 하는 저들의 기도가 나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주의 영광 앞에 기쁨으로 서게 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97:1).” 그럴 수 없는 중에 그러할 수 있는 데 따른 주의 놀라운 은총을 바라였다.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러려니 하고 익숙할 만도 한데 그럴 때마다 아프구나. 그래서 주 앞에 서게 하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그리고 말씀이 날 위해 비신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이를 오늘 말씀은 내 손가락에 매라 하신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3).”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마치 나만 왜 이러고 있나, 싶어서 말이다. 곧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 97:12).” 더는 할 일이 없어진 사람처럼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럼 더는 아이에게 할 일이 없는 건가? 그럼에도 나는 교회에서 아이를 가르치며 어떻게 하면 주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을까? 마음은 휑하고 입은 삐쭉거렸으나 그럼에도 해야 하는 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97:3).” 주님은 일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성령이 내 안에 계신 증거로는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는 거였다. 청소를 하고 예배 준비를 하는 일,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뜻을 살피는 일, 누구로 인해 상한 마음으로 저를 위해 기도하는 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우울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어도, 하던 걸 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자니,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말씀을 되씹으며 주의 도우심을 바랐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럴 수 없어서 주께 구한다. 다시 시작하듯 주의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자. 어쩌면 당장은 내 몫이 아니어도 나의 행함이, 말 한 마디가, 같이 하는 시간이 어느 시점 저 아이가 돌아설 때 주를 마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성령은 저와 함께 하신다. 거기에 내 기도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라고 오늘 내게 안달복달 이와 같은 마음을 두시는 거였다. 그리 짐작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롬 14:5).” 가시적으로 아무런 성과가 없으니까 때론 낙심이 되고 또 절망이 찾아오지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 그래 것도 주를 향하는 마음이기를 기도한다. 낙심도 절망도 선으로 바꾸시는 주를 신뢰한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 아, 내가 죽겠다 죽겠다하는 만큼 저 아이는 살아나 주를 마주하겠구나. 나는 이 말씀을 그리 묵상하였다. 내가 저로 인해 죽는데 저는 나의 몸살로 인해 산다. 말씀은 이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1).” 왜 이렇게 내가 쟤 때문에 징징거려야 하나, 이제 알겠다. 쟤가 오든 안 오든, 그 가정이 주를 영접하든 안 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안달을 부리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13).” 어느 훗날 저 아이가 주 앞에 서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들과 글방에서 예배를 시작할 때도 그랬었다. 어느 아이는 그 부모가 글방이 교회가 됐다는 이유로 그만두게 하였다. 글방 선생이 목사가 됐다는 게 저들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여전히 예배를 지키고 교회를 함께 이루어가고 있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 나는 말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성경의 축복이 나에게는 있었다. 우린 이를 붙들 뿐이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가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욱 넘치도록 하실 것이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시고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그 영광이 대대로 무궁하였다.
잠결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를 생각하고 바라고 구하였던 마음이 이처럼 말씀으로 다시 확신을 얻는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길게 생각하지 않기.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무조건 주께 맡기기.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그러게, 내게 주신 대로 그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 서면 되었다.
그럼에도 아이를 주의 이름으로 마주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마치 예배를 강매하듯 할 수는 없다.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루 주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기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마치 내 몫을 요구하듯 주께 바랄 일이 아닌 것이다. 저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나를 먼저 사랑하신 거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20).”
싫든 좋든,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이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 내 안에 이는 어떤 실망이 또 화가 행여나 아이를 대하는 데 있어 미움으로 나오지 않기를.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건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저 아이를 사랑하는 거였다. 그렇다면 누구를 마다할 수 있겠나? 나야말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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