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전봉석 2017. 5. 8. 06:53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언 8:34-35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시편 98:8

 

 

 

그리고 월요일, 다시 한 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게 적당하였다. 힘들다 죽겠다 하다가도 돌아보면 어느 것도 은혜 아닌 게 없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먼저는 그럴 수 있는 여건과 다음은 그와 같은 마음을 허락하심으로 가능하였다. 말씀으로 들으며, 날마다 그 곁에서 기다릴 수 있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거였다.

 

곧 기다릴 수 있게 하시는 것이지 기다릴 수 있는 역량이 내게 있어서는 아니다. 나는 늘 조급하여서 성급하기 일쑤고 조바심 때문에 번번이 일을 그르치기 잘한다. 있으면 교만하여서 잘 되면 거만해지고 우쭐하여 보란 듯이 내 의를 먼저 바라는 사람이라, 하나님은 앞서 나의 환경을 조성하신다. 그리하여서 주의 은총은 항상 실제적이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를 아는 걸 보니 내가 살았고, 살아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으니 그게 은총이었다.

 

올 수 있는 아이가 나오지 못해 안타까웠고 올 줄 알았던 아이가 오지를 않아 애가 탔다. 나는 설교 중에 내가 이처럼 ‘애 때문에’ 애 태울 줄은 몰랐다고 고백하였다. 타박하고 속상해하다가도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데 따른 이 마음이 사역이겠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는 데 있어 때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더하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쩔쩔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3, 7).”

 

내가 저 아이로 속이 뜨거워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기어이 나의 혀로 말하기를 내가 주만 바라리다. 내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더욱 주만 바라게 되는 거였다. 때론 이것이 신기한데 어찌 말로다 표현할 재주가 없다. 아이로 인해 속 끓이는 게 싫은데 좋고, 벅찬데 나쁘지 않다. 짜증나는데 감사하고, 서운한데 충분하다. 내게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것으로 낙심하다 그것 때문에 감사를 배운다.

 

내게 일어나는 변화를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주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나를 행하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당장은 그게 무슨 티나 날까? 적당할 때야 뭘 하든 적당하다고 여길 테니, 모래 위에 짓는 집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 같다.

 

하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오나니, 그때에야 바로 알 것이다.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왜 그토록 마음 졸이며 저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하느라 더욱 주를 바라고 소원하게 하셨는지를 말이다. 바람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25).” 우리의 주추가 여호와께로 향한 것이었음을. 그리하여서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시 98:8).”

 

이 모든 조화의 시작에 지혜가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 8:22).” 오늘 나에게도 그 지혜는 이르러 말씀하신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8:9).” 그의 심판을 두고 만물이 박수를 친다. 애통하였던 자들이 위로를 얻는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이는 나의 원통함 때문이 아니라 이를 알지 못하는 저들로 인한 애통이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신 주의 말씀에 따른 마음이기도 하였다. 내가 왜 이 애 때문에 이처럼 힘들어하나? 싶다가고 ‘내 양을 치라.’ 말씀하신 주의 뜻이었다. 내 게 아니다. 그렇다면 ‘네 양’이라고 하셨을 것이다. 주님의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덴 그로 인해 내가 애태우고 속 끓이는 게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와 같이 주님의 바람을 바라고 구하게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와 같은 변화를 위한 선택은 우리에게 두신 몫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듣기만 하는 자리에 가만두지 않으신다. 말씀이 내 안에서 나를 못살게 구는 소동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23-24).” 아! 그렇구나! 했다가 금세 또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더는 그렇게 두지 않으신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 말씀을 곁에 두고 이를 들여다보는 자에게는 실천할 수밖에 없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과거형으로 서술되지 않았다. 분명히 현재진행형으로 언급하신다. ‘행한 일’에 대한 복이 아니라 ‘행하는 일’에 대한 복이다. 사랑할 줄 모르더라도 ‘늘 사랑해온 사람처럼 행동하면 머잖아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C. S. 루이스가 한 말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러시는구나! 마음만으론 어림없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건 거울만 보고 돌아선 것과 같다. 잠시 거울 앞에서 자신을 추스르는 정도에서 끝낼 일이 아닌 것이다.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잠 18:15).” 그래서 더욱 주를 알자. 온전히 바르게 말씀을 구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주일 사역을 마치고 다들 우리 집으로 모였다. 어버이날을 맞아 내가 움직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송구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구원론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재를 집필하였고, 이를 내게 보내어 먼저 교정을 좀 보았으면 하셨다. 기꺼이 나는 그 정도의 수고로 그만큼의 특혜를 누릴 수 있다는 데 감사하였다. <가라사대>를 가지고 두 번째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교정과 교열의 미진함이 아쉬웠지만, 그것까지도 내게는 ‘의미’였다. 왜냐하면 때로는 구어체의 문장이 문어체의 서술보다 그 호흡을 여운으로  길게 묵상할 수 있어서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성경 공부하는 녀석이 때론 투박한 교재 때문에 투덜거리지만, 그래서 두 번 세 번 다시 읽는 것은 오히려 유익하였다. 잘 다듬어지고 정갈하게 매듭 된 맛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아무튼 그러겠다고 말씀드렸고, 그리하심에 감사하였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다.

 

그리하여서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2:24-26).” 혹 한 영혼이라도 더 주 앞에 바로 서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는 명령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4:1).”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어렵고 힘들 때 오히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더욱 선명하였다. 그러므로 지나놓고 보면 어느 것도 주의 은혜가 아닌 게 없는 것이다. 우리 형제가 모두 주를 바라며 온전히 주를 기리는 삶으로 살 수 있다는 게 복이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하여 나의 삶 가운데서 말씀이 전파되기를. 이를 항상 힘쓰는 건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의 명령이었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언제쯤 지나 우리 아이들도 왜 그처럼 교회가 곁에 있었는지, 이 못난 선생이 어째서 주구장창 말씀만 운운하며 성가시게 했었는지, 돌이켜 어느 오늘에 이르러서는 말할 것이다. 모든 게 적당하였다. 이 모두가 주의 은혜라. 하며 또 누군가에게 주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이처럼 아버지 옆에서 교회에 관하여, 저들 한 영혼을 두고, 두런두런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으니까 말이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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