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잠언 9:12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99:9
사람의 타락 이전에 죄가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에덴을 따로 두셨다.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빛과 어둠의 정의와 경계를 정하셨다. 이는 첫째 날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3-5).” 여기서의 빛과 어둠, 낮과 밤은 선악의 구분이 된다. 해와 달은 넷째 날에 지어졌다.
예수님도 낮의 개념을 그리 언급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요 11:9).” 이를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러므로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이에 불의한 자의 특징을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13-14).”
창세기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마치 새로운 듯 그 의미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 땅’에 따로 구분하여 에덴동산을 건설하셨다. 그리고 이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으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다. 곧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 27-28).”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2:15).” 굳이 선악을 알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우리 안에 땅의 속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서려 있는 땅을 하나님은 운행하셨다. 주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마치 처음으로 창세를 읽기 시작한 사람처럼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두 장의 성경을 읽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생명나무를 에덴에 두셨구나…. 한참을 읽고 또 읽으며 입안에 오래 머금고 있었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간단하였다. 무생물에게는 선택이 없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선택을 한다. 생명은 전기와 같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다.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선택은 기계적인 행동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활달하고 기발한 것은 그 행동이 기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순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동력이 있다. 그래서 어린아이 곁에 있으면 우리의 엄숙함은 풀어진다. 어른으로 산다는 건 예의를 갖추고,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고, 때론 근엄하고 때론 엄숙하게 자신을 옥좨야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 곁에 있으면 우리의 굳어진 생명은 헐거워져 덩달아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말투며 몸짓이 아이 때의 것을 따른다.
어른들의 반응은 대략 예측할 수 있다. 지겹도록 같은 패턴의 동선을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한다. 잘 길들여진 어느 영혼의 단조로움 같다. 나이가 든다는 건 본의 아니게 선택을 은폐하는 일이다. 아닌 척,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이다. 모든 생명의 선택은 늙음으로 증명된다. 그래서 폴 트루니에는 말했다. ‘기계적인 행위는 모든 생명의 증거인 동시에 생명의 부정이다. 기계적인 행위는 한결같은 열매인 동시에 생명에 반드시 필요한 하인이고 생명의 무덤이다.’
그의 책,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여러 곳에 밑줄을 그었다. 하늘은 황달에 걸린 듯 고비사막을 건너온 모래바람으로 뿌옇게 내려앉았고 바람은 드세게 불어댔다. 오후께 옆 사무실 사장이 차 한 잔 하시겠냐고 해서 녹차 한 잔을 대접 받았다. 저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돈벌이에 대한 것이었다. 새로 하는 다단계며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하면서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뭐라 내가 끼어들 말이 아니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애써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내려온 이들이 속수무책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큰 괴물이 되어가는 듯하였다.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려라. 지켜라. 오전에 읽은 말씀이 뇌리에 가득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주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뚜렷하다.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당하는, 기질을 가졌다. 이를 다스려야 한다.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마다 자기 관심에 매몰되어 뭐라 한들 들을 리 없었다. 다단계가 원래 그렇더군요, 하는 나의 참견에 발끈하듯 저는 자신들의 훌륭한 시스템을 또 다시 설명하려 들었다. 우린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기 나름이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는 게 아닙니다. 떳떳하지요.
마침 누가 와서 나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단호하게 말해서 그런가? 나에게는 더 이상 종용하지 않았다. 하긴 남한에 내려와 3년 공들여 세워온 사업을 접고 그쪽으로 뛰어든다고 하니, 사활을 건 그의 투지가 눈물겨웠다. 앞서 주인 사장은 무거운 기자재를 옮기느라 쩔쩔맸다. 납품한 강판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란 설명을 들었는데도 이해가 어려웠다. 혼자 끙끙거리는 짐을 같이 밀어다 엘리베이터 앞에 놓아주었다. 다들 바쁘게 돌아치는 가운데 나만 덩그러니 유유자적하는가? 싶을 정도로 글방은 고즈넉했다.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잠 9:12).” 오늘 말씀이 나를 붙들었다. 내게 유익인가, 나 홀로 해를 당할 것인가? 현실적으로야 가늠하기 어려운 것 같은데 성경은 이를 분명히 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10).” 그런 자가 말품을 팔아 누구를 설득하고 그에 따른 이윤을 남겨 더 많이 벌고자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살 수는 없다. 내가 다단계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만큼 말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에 말을 더해야 하고 설명하고 이해시켜 그 목적을 달성하는 일,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11).” 어차피 그게 인생이라면 무슨 말을 하고 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주님께 ‘학자의 혀’를 간구한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어차피 말품을 팔며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면 말이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말을 하느니 묵묵히 나의 삶이 저에게 무던하여서 주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를. 누가 들어오자 저에게 나를 소개하는 말이 ‘우리 여기 안쪽에, 목사님이세요!’ 하는데 ‘아 내가 그 값을 다 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같이 어딜 간다던 사람이 생각보다 젊은 남자여서 어떤 노파심이 들기도 하였다. 어떻게 하면 저를 다시 주 앞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저의 수고로운 말품이 동병상련의 탈북여성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데 소용되는 것이었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기도하였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모든 생명은 매순간 선택을 한다. 차를 한 잔 같이 하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탈북하여 3년을 공들여 일구어오던 사업을 새로운 일을 위해 접는 것까지, 사는 날 동안 더러는 어느 게 알곡인지 쭉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알곡과 쭉정이를 판별하여 가려내는 사람이 아니다. 가만 두어라.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9).” 어차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30).” 저가 좇는 게 무엇일지 나는 모르겠으나, 그러느라 교회를 멀리하고 주를 외면하는 데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남한에 내려와 1년 가까이 열심을 다해 교회를 다녔다는 걸 자랑했었다.
가만히 저를 생각하고 저의 두 아들을 생각하고 그 고단했을 여정을 생각하다보면 부디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생각 같으면 그 두 아들이 글방에라도 계속 왔으면 좋겠는데, 게임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데 어쩌면 좋을까? 더는 뭐라 할 수 없는 지점에 서서 나는 그저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한데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2).” 그러므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3).”
그리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어떻게 하면 주의 음성이 저들에게 들릴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참 편해보이세요, 하는 저의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나에게 들리는 걸 저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을 저들에게 들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나로 여기에 두신 이유겠거니! 충만하라, 말씀으로 내 안에 차고 넘치기를. 정복하라, 세상의 헛된 욕망과 아집과 자기애를 무너뜨려야 한다. 다스리라, 그러기 위해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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