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선하시니

전봉석 2017. 5. 10. 07:32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0:19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5
     
     
     
모처럼 친구가 왔다. 밭에서 농작한 야채를 손에 가득 들고 있었다. 조카아이의 탈선을 두고 근심이 깊었다. 스물둘, 어느새 교도소를 두 번째 다녀오게 되었다. 늘 두려운 것은 그 부모의 허물이 자식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무슨 일만 터지면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는 위인이었다. 그와 같은 억하심정은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아주 싫은 것이다. 하나님이 뭘 어쨌다고! 그이의 뻗대는 감정은 익히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조카아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다면… 친구의 시름이 깊었다. 
     
사람의 타락은 단순히 몸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친구에게 ‘영적인 문제’에 대해 설명하였다. 단순히 애가 뭘 어쨌고 그것이 어떤 문제를 낳았고, 하는 정도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배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졸지에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는 의지의 낭패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상실은 억하심정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그런저런 문제의 발단과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하였다. 마침 오전에 앞서 창세기를 읽고 있었다. 
     
죄를 짓고 저들에게 주어진 결과를 보면 우리의 증상들을 가늠할 수 있겠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 악의 특징은 먼저 배로 다닌다는 것과 다음은 흙을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배는 악의 총아다. 특별한 관심과 사랑이 배에 집중된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고전 6:13).”
     
이것은 죄의 특징이 되었다. “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욥 15:35).” 왜냐하면 ‘그 땅의 흙’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그 결과 사람의 형질에도 그 땅의 기질을 가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이를 정복하고 다스려야 했다. 오늘도 악은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 
     
죄의 결과로 여자의 신세 또한 싫든 좋든 판가름이 난다. 저는 그 귀한 아이를 거저 얻는 게 아니라 임신해야 하고 애끓는 정에 붙들려 살아야 하며,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고 다스림을 당해야 한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3:16).” 남자는 여자의 선택을 묵인하였거나 동조하였으며, 기꺼워 같이 하였다.
     
그 결과 저가 다스리고 정복했어야 하는 땅도 저주를 받았고, 그에 따른 소득을 위해서는 죽어라 하고 땀을 흘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7-19).”
     
같이 기도하자.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조카아이가 올 수만 있다면 어찌 글쓰기를 좀 해서 어디라도 문예창작과에 들여보낼 수 있을 텐데,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돌아갔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안 될 거야, 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자. 나는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였다. 
     
도처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 아이들이 병들어 가고 있었다. 어른들이야 다 자기 분에 겨워 그런다지만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잠깐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안성에서 아이가 전화를 주었다. 어찌 지내는지, 간단한 안부를 묻고는 요즘의 근황을 들었다. 아직 발작적인 증상은 없지만 예기불안이 가중되었고, 이를 회피하느라 점점 은둔형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사귀는 남자아이가 구원자 역할을 해주는 듯하였다. 그러니 하나님은 싫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그러니 별 수 없는 일인가? 나는 이제 그와 같은 문제를 영적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뭘 좀 어떻게 잘해보겠다는 자기 의지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죄의 근본이며, 오늘에도 여전히 악은 ‘배로 기어서 흙을 먹는다.’ 자기만족에 겨워 더욱 자극적인, 위로가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하나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자기방어가 우리 영혼을 썩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올 수 없다면 가까운 교회로라도 나가라. 괜찮으니까 원한다면 전화로라도 ‘성경공부’를 하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앞서 나 역시 다를 게 없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가 아니시면 우리가 무엇으로 나음을 입을까?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악은 여전히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 아침에 메모해 두었던 것이 하루 종일 모두에게 적용이 되었다.
     
괜찮아, 하는 건 자기 안에 안 괜찮은 부정한 감정을 다스리려는 자구책에 불과하다. 다 그렇지 뭐, 하는 건 스스로를 놓아두기 위한 빌미다. 그리고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시달리느라 암중모색, 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바동거린다. 죽겠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쩔쩔맸다. 친구는 조카아이 이야기를 하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오빠 아이를 제 아이처럼 돌보고 산 셈인데, 아뿔싸! 일이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일까? 저 혼자 자구책을 찾느라 진이 빠졌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저들에게 어디 가서 누구에게 어떤 하소연을 하는 것보다, 아버지! 하고 전심으로 주를 부르기를 바라였다. 내가 짐작하기로 나에게까지 그 말을 하는 데는 벌써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붙들고 이 말 저 말을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생각하고 애쓰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니 드러나는 것은 허물 뿐이라. 조카에 대해 말하다보니 이혼한 저들 부모에 대해, 그 망나니 같은 삶을 그래놓고는 억하심정이 있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만고의 진리다. 사는 데 따른 가장 단순한 지혜다. 변명하고 항변하느라 우린 또 얼마나 많은 말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누구의 동조를 구하고 그 이해를 바라느라 또 얼마나 말을 희구하며 돌아치는지 모른다. 이는 마치 눈덩이 같아서 굴리면 굴릴수록 커진다. 자신도 미처 몰랐던 허물에 깔려죽을 판이다. ‘아버지, 하나님!’ 하고 부르자. 
     
나는 아이에게 나만의 비법을 가르쳐주었다. 어떤 대답을 바라고 또는 무슨 말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가만히 ‘아버지!’ 하고 부를 때,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 그럴 수 있는 게 어마어마한 은총인 것을 나는 이제 잘 안다. 그냥 불러보라 해도 기어이 부를 수 없는 이도 있는 것이다. 싫은 것이고, 인정할 수 없고,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별 수 없지.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나는 이제 나의 고백을 사랑한다. 천하에 나보다 이를 주저하던 인물이 또 있었을까?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2).” 
     
한 시간 남짓 통화를 하고 부디 아이의 입이 열리기를, 친구의 마음이 주께로만 향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10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