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4 주일
잠언 15:33
지혜의 훈계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지혜의 훈계>라는 주제로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훈계는 그 뜻을 다함에 있고 이를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사명은 말씀을 중심에 두는 데 있다. 말은 숨은 언어로 표정과 몸짓 그리고 행함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편지’와 ‘그리스도의 향기’로 우리의 사명을 정의한 바 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곧 오늘 우리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읽히는 편지글이 된다.
훗날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무엇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5).”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1. 말하고 듣는 일에 신중한 사람이 되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상대가 왜 저러나? 하고 뭐라 할 게 아니라 스스로 그 말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지혜서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말의 소용이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그리하여 말에 신중한 사람은 이를 안다.
첫째,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날 것이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우리는 자신이 한 말을 잊어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감찰하신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주를 경외함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가 훈계를 듣는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눅 12:2).”
둘째, 앞선 세대의 말을 청종하자.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 15:5).”
마침 5월은 감사의 달이기도 하다. 부모에게 감사하고 스승에게 감사하는 것은 앞서 살아온 저들이 있었기에 오늘에 우리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는 막연한 교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2).” 그러므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하신 말씀을 유념하자. 먼저는 ‘주 안에서’다. 그리고 순종함이 유익하다.
셋째,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잠 15:10).”
그러니 뻗대고 자기 고집에 뭉쳐 있는 자는 별 수 없는 것이다. 사느라 수시로 뭉치는 생(生)의 근육통은 자기고집 때문이다. 더는 손쓸 수 없는 불치의 병에 이르는 것은 불순종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알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기를.
2. 행위는 삶에서 드러나고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다.
“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잠 15:11).”
먹고 사는 문제로 허덕이던 시대는 그래도 좀 나았다. 마음의 병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일일이 건사할 필요도 없었다. 가난은 평균적이었고 고달픔은 막연하였다. 한데 현대사회는 저마다 스트레스를 운운하며 마음의 질병을 호소한다. 살만하니까 외로움도 극성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곧 우리의 마음은 드러날 것이다.
첫째, 거만한 마음은 우리로 넘어지게 한다.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잠 15:12).”
누가 뭐라 하는 소릴 못 견뎌하는 시대다. 괜히 뭐라 훈계라도 할라치면 보복이 따를 판이다. 그만큼 악하다. 애도 어른도 거만한 마음으로 꽉 눌린 세대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사 2:12).” 살만한가? 주를 바라자. 스스로 높으면 하나님이 낮추실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둘째, 행복한 마음은 영적인 일이다.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5, 17).”
가만히 보면 행복의 척도는 물질에 있지 않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셋째, 성실한 마음으로 형통함에 이른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 15:19).”
영적 게으름에 대하여는 악의 모양을 도모한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자기고집이 대단하다. 누가 뭐래도 자기가 옳다. 그러니 별 수 있나?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성경의 원리는 간단하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게으름보다 무서운 향락은 없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성실한 마음은 무던히 주를 신뢰한다.
3. 들을 수 있는 귀는 눈이 밝음에서 온다.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잠 15:30).”
눈앞에 아무리 값진 보화가 있어도 그것을 알아볼 줄 모르면 소용이 없다.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 다들 남루하고 비천하다 해도 이에 복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귀는 뼈를 윤택하게 한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전 4:13).” 그러므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첫째, 때에 맞는 말과 이를 들을 수 있는 귀의 조화는 은총이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그러므로 말씀을 청종할 수 있는 귀는 그 어떤 축복보다 값지다. 개인적으로 내가 늘 묵상하는 말씀으로,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구하고 또 바람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둘째, 우리의 사명은 어려운 이웃을 살피는 일이다.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잠 15:25).”
우리 곁에 두신 이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곧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일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나오는 말
우리는 말에 신중함으로 행동에 온전한 삶을 더해야 한다. 말뿐 아니라 행함이다. 마음뿐 아니라 생활이다. 번드르르한 말로 사는 이는 바리새인이다. 저는 자기만족에 겨운 자이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그럼 우리는 어떠한가? 표정부터 다르다. 그 얼굴에 광채가 난다. 부러 꾸미지 않고, 억지로 시늉하지 않는데도, 자신은 몰라도 남은 저를 알아본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 34:29).” 말씀과 가까이 하는 자는 표정부터 다르다. 말씨가 다르고 마음씨도 다르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 왜냐하면 저는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를 가졌기 때문이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잠 15:31).”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32).”
오늘 본문은 우리의 구별됨을 생명의 경계-훈계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이를 신중하게 말할 수 있는 마음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전 11:7).”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들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리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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