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전봉석 2017. 5. 19. 07:29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언 19:2, 8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시편 109:26-27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바른 경계가 왜 필요한지 알겠다. 가벼이 넘기곤 하는 농담과 그럴 수 있다고 치는 TV 시청, 영화-음악 감상, 쉬 넘기고 마는 술 한 잔, 오락, 기호 따위의 선호가 가히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설마, 하던 게 현실이 될 때 그 들이닥친 현실보다 더 엄중한 것은 그동안 내 안에서 연마되어 온 평소의 사사로운 것들의 대처능력이었다.

 

창세기 19장 8절, 다급하게 소돔 성으로 찾아온 천사 둘을 맞은 롯의 태도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아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어쩜 그 다급한 상황에 저리 대응할 수 있을까?

 

앞서 그는 소돔으로까지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선택에 앞서 그는 개의치 않은 것이다. 다만 여호와의 동산 같은, 기름진 땅과 비옥한 환경만 눈에 들어왔겠다. 설마,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소돔에서 저들과 같이 즐기며 행복하게 살았던 것 같지도 않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저는 그 땅에서 의인으로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고통을 당하며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저의 사위들도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간신히 몸을 피해 천사들 손에 이끌려 산으로 가면서도 롯은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산까진 너무 먼 것 같으니까 앞서 가까운 소알 성으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22).” 그러는 동안 그의 처는 주의력을 잃고 안이해져 뒤를 돌아보았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26).” 그리곤 다시 산으로 도망하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저의 두 딸이 낸 꾀는 점입가경이라! 아버지와 동침하여 각각 자식을 얻는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32).”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은 일이 실제가 되는 데는 ‘그럴 수 있지 뭐?’ 하는 안이한 허용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가벼움 때문이었다. 가령 술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술을 마셔본 사람보다 유혹이 덜하다. 담배를 피워본 사람은 문득 그 유혹을 못 견딘다. 성(性)에 대해 일찍 눈을 뜬 경우 그것이 취약점이 된다. 농담을 즐기고 말을 함부로 하는 자는 다급할 때 욕부터 나오는 것이다.

 

아침에 나와 무던히 묵상했던 내용이 마침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 대목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의 저렴하고 조급한 언어 사용과 평소의 태도가 실은 온전히 주를 바라는 데 있어 항시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거였다. 이는 그렇게 대처하려는 판단에 따른 것이어서 보다 그냥, 익숙한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교회를 나가고 안 믿는 가족을 위해 늘 눈물로 기도한다는 아이엄마가 무슨 큰일을 앞두고는 점을 보러 갔다. 사주를 보고 팔자를 운운하며 어찌할까? 판단하는 것이다.

 

아이는 어찌 받아들였을까? 오늘 잠언의 말씀은 그 대목에서 일갈한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나름 소원을 높이 두고 선을 갈구하는 듯하나 실은 그것이 바른 지식을 수반하지 않을 때 악의 그늘에 놓인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 19:2, 8).” 왜 우리가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경외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주가 아니시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살아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믿는 자로서 주변에 영향력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스스로 삶 가운데서 체휼하며 사는 사람들이다(시 109:26-27). 늘 자신의 선호를 우선하는 사회에서, 점점 더 자신에게 자신의 비중을 우선으로 강요하는 시대에 ‘과잉된 책임감’은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하였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5-27).” 알면서도 그는 주저하며 앞서 자신이 행하는 것을 옳게 여기며 살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8).” 아는 것과 아는 것을 행하기란 쉽지 않다. 머리로 아는 걸 가슴으로 느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데는 묘연하다. 못하는 게 아니라, 싫은 것이다. 몸에 익은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꽤 이제 긴 시간을 같이 성경공부를 해오면서 아이는 한 번도 내가 권하는 책을 가져가지 않았다. 늘 읽고 있는 책이 있다는 것이고 실은 그 책도 다 읽지 않고 있어서다. 그러느니 이 책을 읽어봐라 해도 소용이 없다.

 

죄의 악랄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 같다. 싫은 것이다. 하나님이 말이다. 그에 대한 성도의 무방비적인 삶의 모습도 말이다. 왠지 주도권을 빼앗긴 듯하여 원치 않는다. 그러느니 가벼움을 선호하는 것이다. 한 번 웃고 마는, 그럴 수 있는 소비적인 삶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당최 무거운 건 싫다. 진중하고 진지한 건 고리타분해서 말이다. 그냥 웃자고 드는 데에 익숙해졌다. 이를 뭐라 하면 죽자고 덤빈다고 꺼려한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그냥 웃자고 하신 말씀일까? 책 한 권을 권하는 일에서도 순순히 네, 하는 법이 없다. 그러니 그걸 나무라고 야단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아이는 여전히 기도하지 않으며 헌금을 내지 않는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대상에 대해 없다는 쪽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입장에서 없다는 쪽으로 기울 게 아니라 있다는 쪽에서 걸어보면 어떻겠냐? 하고 말하자, 그러다 다시 없다는 쪽으로 기울면 실망이 클 것 같다나?

 

도대체 이런 애를 어찌 내가 다룰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주만 바라본다. 화딱지가 나서 말이다.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고, 돌을 주워서 그만큼 알아듣게 얘길 했으면 네! 하고 대답했겠다. 답답하고 한심한데, 어쩌겠나! 그게 나였다. 여전하여서, 나는 아이에게서 내가 보인다. 다른 애보다 성경공부가 길어지는 건 번번이 쓸데없는 논쟁 때문이다. 이런 말을 왜 해야 하나, 싶은데 그게 어쩌면 하나님이 이 아이를 보내시는 이유겠다, 생각하였다.

 

늦은 점심을 같이 먹고 당구를 치고, 중2 아이들 수업을 할 때 아이도 같이 앉아서 글을 썼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영화화한 것을 간추려 영상으로 편집, 논술 자료로 사용하는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꽉 막힌 자기 안의 상처를 글로 풀어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 남짓 같이 글을 쓰고 너스레를 떨며 중2 아이와 탁구도 쳤다. 한데 신기한 건 중2 아이가 주일 날 오겠다는 것이다. 내가 백 날 얘기하는 것보다 형이 그렇듯 권하니까 순순히 그리하겠단다.

 

거참.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에 대하여는 때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아내가 ‘어느 4학년 아이’에 대해 말하였다. 할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아이아빠는 일 갔고 엄마에 대한 얘긴 피하였다. 고등학교 때 나은 아이였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그래서 종종 이상하게 여긴다고도 하면서. 풀어 논 망아지 같이 천방지축이라는데, 왜 또 이런 아이를 보내셨을까? 아내는 기도를 부탁하였다. 특히 글방에 관심이 더 많으신 것 같다면서….

 

나는 열 시도 안 돼 곯아떨어졌다. 하루가 곤하여 잠이 깊었다. 그리고 일찍 깨우셔서 말씀 앞에 앉히셨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내 안에 저들을 향한 마음을 두시는 데 놀란다. 자의적으로 불쌍히 여기려는 게 아니라 그리 되게 하시는 주의 관여하심이 느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돼.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리고 우린 주를 바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정작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가중한 거 같은데 실은 무엇보다 수월하였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일에 있어 뭐라 이른들 아이가 내 말을 듣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운행하시는가를 보여주면 될 일이다. 나를 지배하고 싶어 하는 온갖 그릇된 습관들로부터의 자유함을 말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이제 확신하는 것은 내가 힘을 뺄수록 수월하였다. 아이를 어쩔까? 내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주께 아뢰는 일이면 되었다. 내가 애쓰고 수고한들, 어린아이든 다 큰 아이든 어차피 내가 어쩌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주가 하신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마 21:3).”


주의 이름으로 주가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그러므로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시 109:1).” 내가 아뢸 이는 주님뿐이시었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21).” 고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26-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