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전봉석 2017. 5. 20. 07:31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

잠언 20:9, 25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편 110:3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게 문제다. 나는 내 마음도 분간하기 어려운 것을 하물며 다른 사람의 속이야 어찌 감당이 될까? 주의력 결핍처럼 아이들은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결국에는 두 형제를 떨어뜨려 앉히고 수업을 했다. 엄마가 그러래요. 갑자기 큰 애가 5만원을 펄럭거리다 봉투에 담아 ‘헌금’이라며 내밀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각각 기도 제목을 적어보라고 하였다. 7월에 태어날 동생에 대해, 그러므로 엄마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였다. 다 그래도 그 속에 생각은 있었다.

 

넘겨짚는 것은 고약한 일이다. 누구를 대하거나 무슨 일을 마주할 때, 그것이 편견으로든 선입견으로든 앞서 생각을 내세우는 데는 난처한 일을 자처하는 셈이다. 그래서 교회를 안 다닌다는 소리와 그럴 줄 알았다는 판단이 서로 닮았다. 어린 목사 아들이 철야예배에 참석하고 다음 날 식탁머리에서 말했다. 아빠, 장로님은 계속 졸았어요. 저 선생님도 계속 하품만 하고, 곁에 있는 누군 아예 깊이 잠들었던 걸요? 그때 목사인 아빠는 말했다. 차라리 너도 자지 그랬니.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그 눈엔 그것만 보인다. 그 숱한 것들 중에 왜 꼭 그것만 보았을까?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이의 어떤 면이 유독 거슬리고 맘에 안 들고 뭐라 속단하게 되는 경우, 그것은 나의 일면이었다. 내가 그런 것이다. 유난히 무엇에 결벽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그만큼의 자기 허점을 알고 이를 무의식적으로 무마하려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를 뭐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관찰하면 두드러진다.

 

아이의 어떤 부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어떤 부분이 두드러진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겨낼까 하여 몸부림쳐보지만 그럼 더 예민해지는 역효과만 난다. 다른 수가 없을까?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시 91:7).” 주가 돌보신다. 나의 어떤 점을 무마시키려고 누구의 유사한 점을 거슬려할 게 아니었다. 비판이란 그런 효과를 내는 거였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유독 뭐라 잘 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그게 그였다. 그게 나였다. 그래서 뭐라 훈계하다 보면 그 소리가 내게로 향한다. 내가 들어야 할 꾸지람이고 교훈이었다. 주를 모시고 산다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사는 날 동안 나의 바탕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눅 8:22-24).”

 

마침 그렇게 돼서 그랬던 것이다. 주여, 내가 죽겠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25).” 그러니까 말이다. 믿음이란 게 그저 뜬소문처럼 그런가보다, 하는 게 아니다. 확신이란 다만 막연하여서 그럴 수 있지, 싶은 게 아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

 

‘그 일 후에’ 마침내 그리하였다. 그러니 사는 날 동안 내가 감히 이르되,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그러는 것보다 어리석은 게 없었다. 주 앞에서 떳떳합니다, 하는 소리보다 한심한 게 없었다. 얼마나 우린 “함부로 이 물건은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덫이 되느니라.” 그러고 사는지 모른다(잠 20:9, 25). 두고 볼 일이다.

 

무엇을 자신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도 나를 자신할 수 없으므로, 오직 주가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설후 3:3).” 주께서 하셔야 가능하였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어찌 무슨 수로 감당을 할까?

 

아이들 수업에 앞서 어느 광고대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교회를 홍보책자에 넣어주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인근 아파트 단지에 몇 개월간 지속적으로 뿌려주겠다는 설명인데, 돈도 돈이지만 뭐라고 문구를 넣어야 할지, 잠깐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점심을 먹고 오는데 사거리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어느 교회는 현수막을 걸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침개와 음료수를 나눠주고 있었다. 혹은 물티슈를 나눠주면서 말이다.

 

그럴 때면 늘 드는 생각이 ‘뭐라도 해야 하나?’ 싶은 것이다. 큰 교회는 괜히 큰 게 아니었다. 차량 운행을 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하며 보다 나은 편의를 제공하느라 여념이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다. 누가 교회 자랑을 하는데 무슨 요일에 무엇을 하고, 다음 주에는 어디를 가고 하는 거였다. 같은 층에서 얼굴을 트고 인사를 나누는 목사는 5월이 되면서는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그러게, 그런 열정과 수고의 열심도 허락하셔야 할 거였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오후에 책을 펼쳤는데,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7-29).” 하는 말씀이었다.

 

믿음으로 행해야 하고, 그 행함은 말씀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그런 엄격한 노력을 요구하고 계신 거였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같이 계신데도 풍랑에 휩쓸려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연히 내가 나서서 마음을 정하였다, 헛소릴 해서는 안 되었다. 스스로 깨끗하게 하였다 할 일도 아니다. 주는 강하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러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주님과 같은 배를 타고 있다. 때론 내 마음이 요동친다 해도, 삶에 질척거리며 또 우울이 화가 나를 엄습해온다 해도,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내 안에 이는 무엇에 대한 염려와 갈등이 나를 자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설령 모든 게 내가 원하는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 히브리서 11장은 읽을 때마다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하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선진들도 이로써 증거를 얻었던, 바라는 것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에 대하여,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2:1).” 앞으로 나아갔다.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말이다. 그러므로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잠 20:18).” 매순간이 전쟁이다. 말씀을 나누고 묵상하고 되새김질 하면서 지략을 가지고,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22).” 주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으로부터 놓여날 때 비로소 주만 바라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24).”

 

말씀은 일러,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29).” 나이가 드는 것처럼 나의 믿음도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이르기를 소원한다. 수시로 드나드는 온갖 서러움과 염려와 걱정을 모두 주께 내어놓고, 되어지는 일을 통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체험하면서.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그러므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