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잠언 21:13, 24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편 111:10
어떤 서운함이 목을 조일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가지고 있던 마음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러는 게 맞나? 주춤하게 되는 것이다. 더는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 서러움 같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나는 새삼 몸서리치게 싫었다. 마음을 주고, 유난히 팔이 안으로 굽듯 하였던 사람에게서 서운함의 농도는 짙어진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여러 번 되뇌며 이해하고 마음을 달래지만 공연히 화딱지만 나는 것이다.
누구를 딱 지칭하여 언급할 일이 아니다. 내 맘 같지 않다. 연락을 할까, 말까, 마치 연애하는 사람처럼 공연히 연락을 하는 것도 부담이 되겠거니, 싶어 조심히 다루던 마음이었는데… 저는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고 있었다! 마치 나에 대해서는 별로, 새삼, 굳이, 흘러간 어떤 기억 저편의 사람인양 말이다. 문득 내가 너무 병적인가? 싶어졌다. 그냥 혼자 안고 가야 하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누가 알랴!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욥 9:24).”
때마침 아이들도 오지 않았다. 두 아이만 못 오는 것에 대해 문자를 주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한 뒤 소파에 누워 책을 읽었다. ‘따귀 맞은 영혼’처럼 시무룩해졌다. 어느 선교단체에 자리가 났고, 나는 제일 먼저 누가 떠올라서 연락을 하였다. 한참 뒤 답이 오길 얼마 전부터 어디에서 사역을 시작했다는 거였다. 그럼 좀 연락을 주지…. 한 아이는 며칠째 답이 없었다. 책을 찍어 첨부하여 좀 읽어보라고 했는데 말이다. 내가 열 번을 연락해야 저가 한 번을 연락하는 셈이다. 좀 지겹다.
공연히 나 혼자 맘 졸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저를 생각하였던 게 손해다, 싶은 것이다. 이런 서운함은 옛사람이 주관하는 나의 마음이었다. 늘 애써야 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제 진저리가 난다. 목사가 되고 가장 홀가분한 게 더는 사람에게 이끌려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그 모든 게 ‘사랑 받고 싶어 하는’ 나의 옛사람이다. 늘 그런 억울함과 고단함이 있었다. 더는 안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된 줄 알았다.
아이들에 대해 왜 이처럼 목을 매나 싶게 온통 마음이 기우는 것은 여전히 옛 사람에 의한 것은 아닐까? 누구에 대한 서운함이 잔불처럼 번져 삽시간에 모두를 향한 불길이 되었다. 얜 어떻게 연락도 없을까?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내보려둘까? 뭐라도 해야 하나? 다시 내가 먼저 연락이라도 해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 늘 생각하고 마음 쓰고 있었다는 걸 서러워할 일은 아닐 텐데.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저를 생각함으로 주의 도우심을 더욱 바라였던 것인데….
책을 읽으면서도 눈은 건성으로 글자를 훑고 있었고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리며 오후 한 때를 어지럽혔다. ‘없앨 수 없다면 줄이고 견뎌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정말 우연처럼 <희망소식> 어느 대목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나의 나 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여전히 사람에게 연연하는 것에 대하여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질질 끌려 다닐 수밖에 없음을 고하였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히 10:31-32).” 내가 주를 알지 못했다면 내가 사람에게 이끌려 살았던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나는 사람이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곧 나의 옛사람이 짊어지고 살던 부채였다. 사랑 받기 위해서는 곱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는 피곤함이었다. ‘고난의 큰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33-34).” 더 나은 소유가 있음을 알고 난 뒤에도 여전한 것은 나의 옛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저들의 그럴 수밖에 없음을 동정하여 나의 빼앗기는 마음에 대해 이제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아는 더욱 영구한 소유를 알고 그게 왜 더 나은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35).” 나에게 말씀이 위로가 되기까지 내가 신음하며 시달려했던 마음이 일조를 하였다. 금방이라도 속상하고 서러워서 다시는 연락을 하나 봐라, 하는 고약한 마음에 뚱했다가 생겨나는 반전이었다. 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36).” 굳이 없앨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고, 여전하여서 옛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줄 알았던 마음인데, 그것으로 나는 인내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말씀을 찾아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시 48:9).” 어쩜 이토록 다 내 이야기가 될까? 그리하여서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77:12).” 전에는 질질 끌려 다니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그 마음으로 주의 행사를 되뇌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더욱,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119:48).”
이에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49).” 서운하였던 마음이 저를 이해하게 돼서 그럴 수 있지, 하는 체념이 된 게 아니라 이제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더욱 더 주를 바랄 수 있다는 데 희망이 되었다. 오후께 아내가 나와 함께 산책을 하고 주일 날 장을 보고 돌아왔다. 뭐라고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만족함이 있었다. 어쨌든 한 주를 또 잘 보냈다. 그래, 불안도 삶의 일부라면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데 사용하자.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종종 나의 옛사람을 마주치게 하신다. 그랬었지? 하는 어떤 아찔함으로 소스라치게 놀라 주 앞에 바로 서게 하시려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아, 그게 나였지만 그것을 나로 삼아 살 수는 없는 일이어서, 어떤 서운함도 서러움도 그것으로 쩔쩔맬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주를 바라는 게 필요하였다. 어쩌면 내 생을 다하는 데까지 나는 나에게서 놓여날 수 없다. 그게 나라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10:21).”
오늘 잠언은 이를 다시금 귀담아 듣게 하신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저가 내게 그러는 게 내가 주께 그러는 것과 같았다. 저를 내가 함부로 서운해 하여 멀리하는 것은 주 앞에 나의 운신의 폭도 좁아지는 일이겠다. 자칫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24).” 나는 아니라고 말하느라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외면하게 될까, 두렵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이처럼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져 내게 들려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 10:29-30).” 저들이 그것이 내게 소중함을 더할수록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려고.
엄살 같지만 어제 오후 혼자 끙끙 앓던 마음으로, 이 아침 주의 위로하심이 크다. 곧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잠 21:20).” 그렇구나. 내 집이 주의 성소가 되었구나. 그러므로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시 119:15).” 이는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27).” 그러시려고,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47-48).”
단지 이 땅에 사는 데 따른 위로의 정도가 아니고,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되게 하시려는 거였다(히 10:34). 그리하여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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