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
잠언 23:9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편 113:3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주를 찬양할 수 있지? 싶은 때가 있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곧 범사에, 모든 가운데서 주를 인정하고 그의 이름을 찬송한다는 게 처절하기까지 하다. 좋을 때야 누군들 못할까?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잘 풀리고 생각했던 일이 척척 이루어질 때야, 사탄 마귀도 아멘, 할렐루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은근히 또 그렇게 알고 있고 말이다. 감사하다는 게 감사할 게 있을 때 유용한 것일까?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여기서 ‘감사하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담긴 서른여섯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시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나의 삶 가운데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아니었다면 오늘에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이제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고 감사한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시 30:4).”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06:1, 107:1, 118:1, 29).” 그는 기이한 일을 홀로 행하신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36:4).” 시편 136편은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에 대하여, 과연 이런데도 감사할 수 있니? 하고 연거푸 묻는 것 같다. 왜 이러시나 싶을 때, 너무하다 싶을 때, 고통 중에서도 과연 주의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 있을까?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사 12:4).”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 이른 새벽에 서둘러 아버지 댁 근처 저수지로 갈 생각이었다.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낚시도 가고 싶었고 부모님과 점심도 먹고,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면 서너 시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이래저래 준비하고 다섯 시엔 출발을 했어야 하는데, 다섯 시를 조금 넘겨 일어난 것이다. 망설이며 묵상을 하였고, 포기를 하고 여느 날과 같이 움직였다. 그런데 이사 차량이 들어와야 한다고 차를 좀 빼달라고 전화가 왔다. 이런!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안증은 뭉그적거리며 시간을 끌고 마음은 한 번 해보자고 재촉하였다. 출근시간도 얼추 지났으니까 말이다. 기름을 넣고 세차를 하면서 나의 불안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지연시켰고, 마침 고속도로 앱에서는 크게 막히는 길이 없었다. 그런데 웬걸! 저만치 길이 막히자 숨이 가빠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얼른 안정제를 삼키고 주의 이름을 남발했다. 판교를 조금 지나자 청계 터널 앞으로 꽉 막힌 길은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성남 쪽으로 빠질까 하다 여의치 않아 결국 송파까지 붙들려 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불안은 두려움으로 이어졌고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후회와 원망이 밀려들었다. 족히 세 시간을 길에서 애를 쓰다 간신히 돌아왔다. 시무룩하게 이른 점심을 먹고 글방으로 나가 우울감에 시달렸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아! 입을 삐쭉거리며 성난 아이처럼 굴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었고, 책도 읽기 싫었다. 너무 무모했다는 생각만 들고,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힘에 겨웠다. 그런 내게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은 그게 나로구나! 괴롭게 하신다.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잠 23:9).” 나는 여전히 나의 아집과 고집만으로 주께 바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이루어질 땐 감사가 저절로 나오는데 그렇지 않을 땐 어찌 감사해야 할지 어리둥절해진다. 남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이 어쩜 이렇게 고단하고 어려운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뚱한 내게 한 술 더 떠서,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3).”
과연 감사는 조건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여느 조건과 무관한 것일까? 어떠하든, 그럼에도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시편 136편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도 힘에 부친다. 감사를 잃으면 원망과 비난이 고개를 들고 자조 섞인 비아냥거림과 자책이 들어찬다. 삽시간에 자신으로 무장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거 봐, 내가 뭐랬어? 내 안에서 설득력 있는 자괴감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입을 댓 발 내밀고 나는 성난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아내와 딸애가 어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뒀다. 만사가 귀찮고 서글펐다. 견뎌내고 거기만 좀 더 갔어도 됐을 텐데, 하는 어떤 미련이 또 화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한심하고 처량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왜 이러시나 싶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감사가 돼야 감사를 하는 것인지, 감사를 하면 감사가 되는 것인지! 성경보다 잔인한 말씀도 없다. 감사할 수 없는데 어찌 범사에 감사가 가능할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에 합한 삶이란 감사를 잃지 않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등식을 성경은 고수한다. 범사에 감사하라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 26:38).” 공교롭게도 오후께 읽은 책의 내용에서 메모해둔 성경구절이었다.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20:22).” 그런데 나는 번번이 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26:41).” 기도함으로 환경과 여건이 달라진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이로써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게 다른 것이다. 하긴,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겠나!
그렇게 축 쳐져 있는 내게 바울 사도가 말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그렇게 됐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여전하여서 부족함과 연약함을 여실히 확인하였다. 막힌 길을 모두 빠져나와 돌아오는 길에 새삼 깨달았다. 나의 아집과 교만이 참으로 단단하였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나는 늘 말씀과 충돌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내가 못 박은 그가 나의 구원자이셨다. 그러므로 그런 나를 드리는 게 예배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리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그렇게 하시려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시려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내게 향하는 나의 관심과 애착도 모두 주의 것임을 깨닫게 하셨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모든 의지와 애씀까지도 말이다.
그런 내가 내게는 힘들어도 내게 힘든 그런 나로 인하여 내가 주를 더욱 사모함으로 감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3).” 그러므로 모든 즐거워하는 감사들마저도 주의 것임에 감사하라.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3:11).”
새로운 날 아침, 그리하여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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