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전봉석 2017. 5. 25. 06:50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언 25:13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시편 115:15

 

 

 

누구와 통화를 하고 카톡을 하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해 새삼 깨달은 바가 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이를 단지 숙명론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삶을 사는 것에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엄마니까, 가난하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를 지고 주를 따르라는 소리로 해석하는 건 너무 지엽적이다. 그렇다면 굳이 주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데도 그와 같은, 숙명론적인 자기 수고를 짊어지고 산다. 이를 ‘십자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구속의 십자가였고, 우리의 십자가는 그 남은 피의 십자가인 것이다. 이를 바울 사도는 매우 적절하며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였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곧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십자가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사는 것으로 십자가라 할 수 없다. 그건 안 믿는 여자도 한다. 주어진 악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성실함으로 사는 일을 자기 십자가라고 해석해서도 안 된다. 그건 주 없이 사는 자연인으로서도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거 보면 제 시간이 너무 없다는 거예요. 저는 억울하다는 듯 말하였다. 그러는 모든 게 이미 자기 시간인 거지! 나는 그와 같이 따로 분리하려는 마음이 억지스러워보였다.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에 살면서 희생을 내세워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우리의 그릇됨을 보았다. 그리고는 덧붙여 이를 십자가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먼저는 주를 따르겠는가? 하는 선택의 문제를 통과해야 한다. 굳이 그럴 마음이 없다면 이런 고민도 의미가 없다. 군중으로 살면서 먼발치께서 주를 따르는 것으로 족한 신자도 있다. 혹은 근접한 거리에서 따르되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는 이도 있고, 지근거리에서도 ‘자아실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저는 사탄이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가감 없이 꾸짖으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16:23).” 나대며 자기 확신으로 들떠 있던 수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후 나온 말씀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주를 따르겠다면 말이다. 죄는 우리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지만 악은 오늘에 있어 선택에 따른 결과다. 마귀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만 사탄은 수시로 내 안을 드나들며 나를 넘어뜨리려는 실상이다. 이에 선택은 필수고 우린 그 결과로 산다.

 

설명을 하면서 내 안에 새로운 해석이 밀려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나의 십자가, 그 고달픔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자아실현을 멈춰야 하는 일이다. 엄마로서, 가장으로서, 선생으로서, 목사니까 하는 따위의 당위적인 이유는 모두 자아실현의 선두에 선다. 그러니 다들 희생을 운운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자기 억울함을 담보로 제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자기 괴로움, 고달픔, 고통, 인생의 질고가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말씀은 의미가 퇴색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는 결이 달라진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엄연히 다른 것이다. 안 믿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생을 추구하면서 거기에 십자가를 도입하려니까 왠지 아구가 맞지 않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되 이를 맡은 청지기적인 사명으로 감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기 불안과 행복에 겨워 아이를 쩔쩔매는 걸 희생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결국 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남을 돕고 이롭게 하는 데 목적을 둔다면 홍익인간의 정신이 훨씬 우월하다. 말씀이 설 자리를 잃는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말씀은 우리를 ‘충성된 사자’로 정의한다. 주를 대신하여 이 땅에서 그 사명을 다하는 자이다. 저는 주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게 의무다.

 

오후께 <제7 기사단>이란 영화를 보았다. 군주를 향한 가신의 절대복종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충성이란 자아실현이 아니다. 마침 아이가 파일을 하나 보내서 읽어보고 의견을 주면 안 되겠냐고 하였다. 김엄지의 <돼지우리>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취업경쟁에 내몰린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그리고 있었다. 인간성 상실에 따른, 그래서 ‘먹고 싸는’ 본능에 입각하여 돼지를 형상화하였다. 그 가운데서 여성성은 비하되어 한낱 소모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남성성은 이내 우월성을 잃지 않으려 더욱 잔인화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충성된 사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나님 없는 자리의 어쩔 수 없는, 사탄스러운 몰골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막 8:33).” 저는 금방 고귀한 고백을 한 뒤였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29).”

 

그 고백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고 그에 따른 훼방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 우리 안에 사탄이 난무하다. 꼭 같이 움직인다. 호시탐탐 견주어 때를 노린다. 말씀 묵상으로 흠뻑 주의 은총에 심취해 있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화가 또 원망이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좌절을 느낍니다. 저의 말에 나는 그 좌절이 고상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좌절이 결코 훌륭할 수 없지만 좌절로 인해 주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함에 대하여는 복이었다. 그럴 수 있는 게 은총이었다.

 

다시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사느라 얼마나 애쓰는지 모른다. 누군 누구대로 저마다 수고하고 애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숙명이다. 이 땅은 사탄 마귀의 권세 아래에 있다. 그 날이 항상 추수하는 날 같다. 할 게 많다. 짬이 안 난다. 내 시간이 너무 없어요.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 신랑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아이 돌보는 일에 진이 빠진다. 그러다 자신은 도태될 것 같아서 복지학을 공부한다. 이 달에는 리포트도 제출해야 하고 시험도 치러야 한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시 115:15).” 충성된 사자에 대한 정의다. 저는 얼음 냉수 같다.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주군이 흡족해하실 때 가신(家臣)은 만족함을 얻는다. 기꺼이 목숨도 버린다. 주가 우리에게 맡기신 십자가를 외면할 때, 상실된 인간상은 돼지와 다를 바 없다. 먹고 싸는 일에 여념이 없다. 선정적인 성적인 묘사가 뒤틀린 인간의 자화상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김엄지에 대해 찾아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을 거절할 때,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기를 포기한다. 스스로 ‘돼지우리’에 갇혀 사는 것이다. 누구를 원망할까? 그 안에서 자족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철저하게 인간성을 포기하는 수밖에. 돼지가 될 때 돼지우리에서는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법이다. 어쩌겠나? 머리는 소크라테스를 한 발정난 돼지로 사는 수밖에. 기어이 그것으로 행복추구권을 운운하겠다면야 별 수 있나? 사는 날 동안 살아보는 수밖에.

 

우리의 거룩은 거룩하신 이가 거룩하지 못한 나를 사용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나는 저에게, ‘어떠하든’ 말씀을 묵상할 것과 같이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릴 것을 당부하였다. 묵상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가정예배는 문제의식이 없는 돼지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단서를 덧붙이기를 ‘억지로라도’ 했으면 하고 바랐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돼지는 절대 억지로라도 자아실현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서조차 자아실현을 우선한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괴물이 어디 있을까? 차라리 안 믿는 자보다도 혹은 타 종교 우상을 섬기는 이보다도, 우린 언제든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우선하는 사탄이 될 수 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목사가 사탄일 때, 엄마가 사탄일 때, 교사가 사탄일 때, 사회 지도층 인사가 사탄일 때, 그 끔찍함에 대하여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자. 이 지긋지긋한 ‘돼지우리’에서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시 115: 5-7).” 돼지처럼 돼지가 돼서 그것으로 자아실현을 운운하며 만족에 겨워 살아서야 되겠나? 단지 사는 데 따른 행복이 전부라면, 그것으로 인생이 한정된 것이라면, 것도 뭐 그리 추할 것까진 없겠다. 사고하는 돼지로 사는 버거움이 있을 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잠 25:28).” 별 수 없다. 충성된 사자로 사느냐, 돼지우리에서 만족스러워 하는 돼지로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고로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17).” 하나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