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잠언 22:19-21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편 112:7
마음을 두고 기다리는 일에 질린다. 또 그럴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잔인하였다. 슬그머니 안정제를 입에 물고 깨물었다. 쓴맛이 혀끝을 타고 목 안쪽으로 넘어갔다. 새벽에 일찍 서둘러 낚시라도 갈까 하였는데 늦었다. 날이 밝기 전에 움직였어야 하는데, 괜히 더 어디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불안에 따른 회피는 공연히 몸도 좋지 못하다고 주문한다. 실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늘 말씀을 마주할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롭다. 이 모두는 나로 더욱 여호와를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를 알 때 내 앞의 것은 특별해진다. 나를 위해 기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고, 또한 나를 보내신 자에게 회답하게 하시려고 기다리신다. 내가 더욱 주를 의뢰하려고 말이다. 모든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애 3:38).” 이를 내 앞에 두신 것이다.
이어져 생각이 미치는 말씀을 찾아다 다시 묵상해본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내가 내 앞에 놓인 아이들로 또는 내 몸과 여건과 환경을 두고 더욱 주를 의뢰한다.
어쩌지? 하는 염려와 근심은 다음에 이어질 흉흉한 소문 때문이다. 이어서 시편에서도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 그게 나여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다른 주일도 그렇지만 특별히 아버지가 멀리서 오는 주일에는 더욱 신경이 쓰이는데, 와야 할 아이와 오겠다던 아이도 오지 않았다. 어떤 기다림은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만인데, 이게 참…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아 종잡을 수가 없다.
이때 이제 확실한 건 모든 상황이 말씀을 근거로 의를 이루게 하시는 데 있음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나는 이제 그 의미가 무엇인가, 그 뜻을 헤아려 알기를 바란다. 그러는 동안 나의 사소한 마음이 또한 생각이나 느낌이 주의 뜻을 훼방하지 않기를, 고단한 몸으로 혹은 환경으로 지치지 않기를, 아이들을 향한 소망을 접어두지 않기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
하나님이 강하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나는 둘 다 주격조사인 ‘은’과 ‘이’를 두고 잠시 망설이다가 ‘하나님은 강하시다.’ 보다 ‘하나님이 강하시다.’로 썼다. ‘은’은 여러 다른 것들과 비교되는 듯하여 그 중에 당연히 으뜸 또는 하나로 읽히는데 ‘이’는 다른 무엇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당연히 유일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어서 말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절대 명제 앞에서 주를 의뢰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3).” 내 안에 두신 주의 영이 그 빛으로 향하게 하심을 믿는다. 내가 어찌 이루어갈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그리하여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리며 공연히 시무룩해지고 낙심이 들기도 하지만 내버려두었다. 일일이 그런 마음을 돌보고 건사하느니 그것까지도 그리하여서 주를 의뢰하게 하시려는 데 의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럴 수 있느니, 나는 다만 주의 너그러운 마음과 인자하심을 바라였다. 서운해 하거나 낙심하지 않기를 구하였다. 아이를 사랑하되 그 아이로 마음이 빼앗기지 않기를. 오후께 아래층 아이엄마가 아내에게 전화를 하였다. 병원에서 잠깐 나와 작년에 죽은 모친의 기일을 지키느라, 아빠에게서 아이도 잠시 다녀갔던가 보다. 몸이 찌운하다며 약까지 먹고 일찍 누웠던 아내가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갔다. 그런데 얼마 못돼 도로 온 것이다. 또 술에 절어 다른 아이엄마와 술추렴을 하고 있더라나. 횡설수설, 할 말도 없고….
화딱지가 나기도 하고, 뭔가 안타깝기도 하고, 질기고 질긴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다. 아예 이제 아이아빠가 아이를 맡기고 했다나… 이틀 와 있는 동안 아이가 정나미 떨어지게 굴더라나… 그래서 다신 안 오겠다고, 이제 아홉 살 된 게 뭐라 표독을 떨고 간 모양이었다. 술에 담배에 늘 똑같은 타령의 참견과 잔소리에 아이도 지겨운 거였겠다. 더는 어쩔 수 없는 대목에서 아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살기운이 있는지 열이 올라 얼굴이 붉었다.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욥 9:24).” 하나님이 강하시다. 다른 이가 없다. 불쑥, 아이엄마의 무례함에 화가 나다가도 저의 그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는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오겠다고 하면서도 아이가 주일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나, 듣다보면 그런 것 같은데 실은 삶에서 이를 중히 여길 수 없는 처지나, 자신도 자신이 여의치 않은 삶의 고달픔에 대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시 35:22).” 그러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139:17).”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이엄마를 생각하며, 생각하는 일로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다른 무엇도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될 일도 아닌 것 같고, 그럼에도 주일 날 아침이면 나는 기도 노트에 나와야 할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는다.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더는 기억도 없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이름이 될까봐서도….
이렇게 또 주일이 지나갔다. 몇 번의 주일을 더 지나고 나면 주 앞에 설 수 있을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하여서, 주님은 기도이시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8).”
그러므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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